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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근원찾기

돌들이 일어나 소리지르리라.

돌들이 일어나 소리지르리라.


  1. 

  어떤 종교집단이든지 그 집단이 위기를 맞이하였을 때에는 과거 그 종교집단의 원형인 믿음의 대상에게로 회기하게끔 되어 있다.
  오늘 한국교회와 관련한 이런저런 문제들 - 국내외적으로 아프가니스탄 선교와 이랜드 사태 등 - 에 있어서도 우리는 오늘 믿음의 주체인 예수에게서부터 그 답을 찾아가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전제해야 할 사항은 예수와 우리 사이에 2000년이라는 시차가 있다는 것과 이로 인해 믿음의 실체인 예수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필터링에 의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 자신의 역사적 유한성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처한 정황에서 그 대상을 바라보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다머(H. G. Gadamer)는 그의 책 『진리와 방법』(Truth and Method)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관심은 틀림없이 대상(subject)에 있지만 그 대상이란 우리에게 보여지는 관점(light)을 통해서만 그 생명력을 얻는다."

   2.

   그렇기에 예수는 역사 속에서 그들이 처한 정황에 따라 다양하게 이해되어져 왔다.
   예를 들어보자. 성서 속에는 바울서신에 묘사된 예수와 마태나 야고보기자에 의해 이해되어지는 예수, 그리고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그릇에 담긴 원시 기독교에 나타난 예수가 그러할 것이고, 기독교회사 속에서는 헬라적 기독교에서 바라본 예수와 중세 라틴적 기독교에서 이해한 예수, 그리고 종교개혁적 기독교에 나타난 예수가 그러할 것이다.
  오늘날에는 서방교회라 칭해지는 천주교의 예수 이해와 개신교의 예수 이해가 그러할 것이고 신약성경을 22권으로만 제한하고 있는 동방교회의 예수의 이해 또한 그러할 것이다. 결국 이러한 다양성은 - 어떤 하나는 맞고 다른 것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 그만큼 하느님(神)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을 통해 오늘날 일부 한국 기독교의 잘못된 행태에 대해 일별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3. 

  예수시대, 로마제국의 침략과 헤롯 가문의 수탈로 인해 전통적인 갈릴리 농경사회는 서로 돕는 자생적인 농민 협동조직이 거의 와해되었다. 
  이 속에서 예수는 갈릴리 농민들과 함께 밥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었다. 이를 통해 예수는 서로 돕는 관계, 친구관계를 회복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동무가 되어  - 삭개오와 같이 - 빚을 탕감해주고 삶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었다.(오병이어 등)
  예수는 그 당시 강도 만난 그들의 삶에 들어와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이웃이 되어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것이다. “하늘을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을 보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이다.
  이러한 예수의 정신은 초대교회로 이어져 코이노니아(사귐)로 나타났고 이는 다시 디아코니아(봉사)로 열매 맺었다. 요한복음기자는 하느님의 나라가 여기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 사이에(among)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교제와 봉사를 통해서 말이다. 

  4.

  이제 아프가니스탄 선교와 관련해서 이야기 해 보자.
그 옛날 마테오리치는 중국선교를 위해 변방에서 사서삼경을 다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야훼 하느님을 하늘의 주인이라는 “천주”(天主)라는 말로 번역하였다.
  오늘날 “선교”를 이야기한다면 적어도“선교”란 그 선교지에서 그들과 함께 이웃과 친구가 되어 삶을 함께 나누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의 정치와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함께 언어소통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노력을 기울인 후에도 그들과의 만남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그들에게 우리는 여전히 낯선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기선교”를 꼭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곳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함께 나누는 행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예 기독교의 “기”짜도 이야기하지 않고 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음전파”라는 것은 그곳에서 뼈를 묻기로 하신 분들의 몫으로 남겨 놓아야 한다.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 어떠한 행동도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 순수한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내가 바뀌기 어려운 만큼 남을 바꾸기 또한 어렵다는 것이다. 하늘이 두 쪽 나도 내가 무슬림이 되지 않을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무슬림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오늘날 개신교가 상대방의 가난과 비참을 이용해서 그들의 삶의 방식과 생각의 방식을 바꾸려 한다면 그것은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무례함이고 예수의 정신에 반하는 것이리라. 이런 식의 해외선교는, 조금 극단적 표현을 쓰자면, 황금을 손에 거머쥔 한국교회의 여흥거리에 불과한 것이다.

5.
  요즘 아프가니스탄 이야기 외에 개신교와 관련되어 회자되는 것 중의 하나가 <이랜드 사태>이다. 종교적 언어를 빼고 경제적 언어로 설명하자면 이랜드 사태는 용역화, 외주화를 막지 못한 새로운 비정규직 보호법의 약점을 이용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용역화 함으로써 무리한 기업 확장의 부담을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문제는 자기 능력을 넘어선 욕심을 부려 “홈에버”를 인수한 이랜드그룹이 - 국가권력을 앞세워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 기독교를 통해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는 점이고, 이랜드 박성수 회장은 “성경에는 노조가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이랜드 전 직원 앞으로 “불법파업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노동조합원들이 하느님 앞에 회개하고 현장으로 복귀하여 다시는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의 달란트(임금)에 불만을 갖지 않는 성실한 종의 소임을 다하도록 기도하라”는 기도제목을 하달했다고 한다.

6.
  마태복음에는 최후의 심판을 설명하기 위해 예수가 양과 염소의 비유를 들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중요한 잣대는 바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 있다.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오늘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예수에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반문해 보고 그 잣대를 한국교회에 대어 보아야 한다. 그리고는 그 옛날 예언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떠한 아픔을 겪더라도 틀린 것을 틀렸다고 과감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생명력이 아니던가? 만약 한국교회가 계속 침묵하고 있다면 분명 예수의 말씀대로 돌들이 일어나 소리를 지를 것이다.

2007년 가을호 / 진주YMCA 소식지 꿈땅 화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