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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근원찾기

대안은 무엇인가?

대안은 무엇인가?
1. 序


  지금껏 인류는 과학 기술 문명의 발달을 통해 전대 미문의 물질적 혜택을 누리면서 삶의 안정 및 질적 가치를 도모해 왔으나 오늘날 인간은 안정을 느끼지 못한 채, 오히려 하나 밖에 없는 지구(생명체)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사실 근대 이래로 인류는 神을 떠나 자율성을 얻으면서 효율성을 최상의 가치로 삼고 찬란한 과학 기술 문명을 발전시켜왔다. 하지만 인간 중심의 자율성과 효율성 문화로 인해 인간의 가치는 오히려 하락되었고, 급기야 관계성을 상실한 "죽음의 문화"는 공동체적 안정 또한 심각하게 훼손시키면서 생명권(Biosphere) 자체의 존속을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결국 전 지구를 쇼핑 상가화시키면서 생명체의 파멸을 가속화시키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은 근대의 기계론적 인식에 근거한 것이며, 인간을 神으로부터 분리시키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2. 天上天下 唯我獨尊[각주:1]


  성서(Bible)는 인간 죄의 기원이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으면서부터 시작된다고 묘사하고 있다. 즉 하느님은 인간(아담)에게 에덴동산에서의 모든 것을 다 허용하되, 단 한 가지, 선악과만을 따먹지 못하게 함으로써 하느님 자신의 권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인간)은 유혹에 못이겨 선악과를 따먹게 된다고 성서의 기자는 기술하고 있다.
  이를 사회학적 관점에서 접근해 보면, 하느님(공동체)의 것인 선악과를 아담(개인)이 따먹음으로써, 즉 사적소유화 함으로써 죄를 짓게 된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의 것은 절대 사유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 인간은 神의 자리에 인간을 대치시키고 하느님의 것을 사유화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16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엔클로저(enclosure) 운동 - 공유지 울타리 치기 - 이다.[각주:2] 
  근대 이래로 인류는 엔클로저 의식을 자신의 천성(天性)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자연에 울타리를 치며 하느님의 것을 사유화해 온 것이다. 이를 지키기 위하여 국가와 기업과 군대는 삼위일체적 관계를 맺게 되었고, 스스로의 힘(자율성)에 의해 자족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위대한 환상’에 사로 잡혀 살던 오늘날의 인간은 결국 자신의 존엄성은 물론이거니와 자연의 생명까지도 송두리째 뿌리 뽑고 있는 것이다.[각주:3] 엔클로저화 된 오늘날 지구의 공유지, 즉 땅․ 바다․ 전자파 그리고 유전자 모두가 서구에 의해 사유화되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라.[각주:4] 

  한편, 이러한 일련의 행위 저변에는 근대 기계론적 세계관이 위치하고 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데카르트의 경우, 자연을 관성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죽음의 세계"로 이해하였고, 베이컨은 기술을 통한 자연 지배를 기독교 구원론의 맥락에서 이해함으로써 자연을 창녀의 메타포로서 기술하였다. 아담 스미스의 경우 ‘보이지 않는 손’으로서의 시장(자유주의 경제론)을 통해 무한 공급을 주장하였으며, 존 로크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사치이고 낭비이다. 자연을 부정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라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근대 계몽기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자연으로부터의 분리에 대한 철학적․ 이념적 정당성을 우리 인류에게 제공함으로써 神을 떠난 인간은 이제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 것인양 소비의 미덕을 최고로 생각하면서 자연(지구)을 착취하여, 전대 미문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물질만능주의를 위해 자신의 어머니인 자연을 창녀로 만들어 버린 순간부터 자기 파괴적인 탕아가 되어 영원히 방황하고 있다. 오귀스탱 베르크은 『대지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 에쿠멘의 윤리적 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세기는 환경과 이성과 휴매니즘이 함께 위기에 처한 시대이다. 근대성이 이루어 놓은 세계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

3. 이열치열(以熱治熱)


  어느 해 신년 벽두에 한 작가가 다음의 글을 신문에 기고하였다.

  “어떤 선사에게 제자가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추위나 더위로부터 피할 수 있겠습니까?’ 선사가 말하길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면 되지 않겠느냐’. 제자가 다시 묻기를, ‘그러면 어느 곳이 추위도 없고 더위도 없는 곳인지요?’ 이에 대해 선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추울 때는 네 자신을 철저히 춥게 하고 더울 때는 네 자신을 덥게 할 때, 바로 그곳이 추위도 더위도 없는 곳이 아니겠느냐?’” 

  사실 우리는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을 믿고 바라며 사는 일을 지금껏 반복해 왔고, 지금도 세계는 그러한 환상을 위해 인간을 계속 닦달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이것을 기독교가 말하는 "하느님 나라"라고 하든지, 마르크스가 말하는 "공산사회"든지, 또는 "신자유주의의 체제"든지, "테크노피아의 미래"든지 간에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을 약속하며, 바라고 믿으라고 강요받고 있다.

  그러나 그런 미래가 존재할 수 있는가? 오히려 선사의 말대로 자신을 춥게 하며, 때론 덥게 만들려는 뼈를 깎는 아픔과 고뇌, 곧 수행적 영성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세계를 단일 시장으로 만들려고 하는 다국적 기업들은 전 지구의 쇼핑 상가화를 목표로 소비의 미덕을 한결같이 찬양하면서 생태계를 약탈하고 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서의 소비란 인간의 기본적 욕구와 향유에 근거하지 않고 차이에의 욕구에서 비롯된다. 소비는 사회 내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함으로써 그 자체로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예를 들어 오늘날 ‘소비인간’은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기호를 입음으로써 남들과의 차별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차이 표시 기호를 통해 소비되는 것들 대부분이 서구 중심적 가치라는 사실이다.

  한편, 수많은 세월 지켜져 내려온 종(種)들간의 장벽이 무너져 내림으로써 퓨전 생명체들(예컨대 ‘쥐인간’)의 탄생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정보 산업을 토대로 한 생명공학은 생명체가 지닐 수 있는 미래적 특성을 사전 프로그램화하여, 생명체에게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줌으로써 생명체로 하여금 인공적인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유기체의 유전자 명령을 조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우생학적 우주론 속에서는 생명 종(種)의 고유성 및 영적 본질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사라져 버리고 만다. 기술의 선택이 이제 모든 선택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이 되어 버린 상황에서 우생학적 세계관을 업고 전개되는 생명공학은 인류의 미래를 더욱 위험하게 만들어 갈 수 있다.[각주:5] 결국 정보화 산업을 근간으로, 신자유주의 시장원리와 생명공학의 결과를 전 세계에 확장시키려는 서구의 논리는 소위 부익부 빈익빈의 구조를 더욱 견고히 하면서 자연의 황폐화를 가속화시킬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세계를 단일 시장화시키는 다국적 기업들과 이카루스의 신화를 재현시킬 수 밖에 없는 현대의 과학기술에 맞서 세계 내 모든 종교들이 그들의 기본 가르침에 따라 실천해 나가야 한다. 즉 생명공학 기술을 통해 인간의 탐욕을 세상에 복제해 내기보다는 이미 복제한 듯 모두에게 깃들어 있는 하느님 형상이나 불성 등을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바른 길이 아니겠는가?

4.. 환골탈퇴(換骨奪胎)


  주지하듯이 지각 있는 사람들은 21세기의 화두로 단순성(Simplicity)과 협동(Cooperation)을 들고 있다. 지난 세기까지의 세계가 자유와 평등의 이념에 따라 살아왔다면 이것의 올바른 구현을 위해서라도 이 두 가치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성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을 증진시키며, 협동은 개체화된 인간의 비극(어머니를 창녀로 만든 근대인간)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이다. 특히 오늘날의 인간은 최소한의 물질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오늘의 죄는 배고픔으로 남의 빵을 빼앗는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필요 이상의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에게서 발견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먹는 빵은 언제든 나에게 있어서는 물질이지만, 내가 남에게 준 빵은 영원히 정신으로 기억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관계 그물망 속에 있으며 협력을 통해 구체화 되어지기에 우리의 삶은 전체(관계)가 만들어 내는 힘에 의해서 지속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간디는 ‘진리(神)란 공동체를 세우고 유지하려는 노력에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이는 간디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곧 일체 타자와의 연대를 神(진리)의 행위로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삶의 연대를 위해 필요한 것은 ‘마음 다하기(Mindfulness)'이다. 동양 속담에는 “마음이 없으면 보고도 안 보이고 들어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서로 상호 연결된 것으로 느낄 수 있다면 다른 존재에게 행한 것이 곧 나 자신에게 행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성서는 우리가 서로 같은 몸의 지체임을 말하고 있으며, 예수는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마음이 자신에 대한 마음과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 또한 예기(禮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큰 도가 행해지면 사람은 자기 부모만을 부모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21세기 "생명"이란 화두를 가지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첫째, 속도 늦추기 - 속도를 늦추고 느림의 생활 양식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神이 만든 시간은 너무도 넉넉하다. 하지만 여기서 느림이란 나태가 아니라 자연의 속도를 말하는 것이다(자동차의 속도가 아닌 보행의 속도...) 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바쁨이 능력을 의미할 때, 빠름은 숭배의 대상이 된다. 속도를 높여 시간을 늘려가는 현대인은 자신과 주변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생태맹들이다.

“패스트푸드가 있습니다. 20초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바쁨이 능력이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소중한 것을 놓쳐 버리고 사는가? 하루 하루가 시간에 쫓기는 지옥이 되다보면 사유능력 및 성찰의 능력은 퇴화되고 인간관계는 도구적으로 바뀌게 된다. 마틴부버의 말대로 현대인간의 관계가 나와 너의 인격적인 관계가 아닌 나와 그것(it)의 관계로 전이된 것처럼 말이다.(마틴부버의 『나와 너』)

  둘째, 침묵하기 - 느림의 생활을 위해서는 침묵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일견 세계로부터 감각을 닫는 훈련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참된 침묵은 외부 입력을 멈춘 채 일체와의 연결을 느끼는 감각을 각성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침묵(명상)은 자신의 소리를 그치고 타자의 소리를 타자의 소리로 듣게 하는 것이다.(以觀之觀) 또한 태양(의식)을 끔으로써 광대한 우주와의 만남으로 우리를 이끌며, 인간을 자연으로 돌아가게 한다. 즉 더디 움직이는 자연 리듬에 자신을 맞출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들에 핀 백합화와 공중 나는 새를 보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런 명상, 침묵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들에 핀 백합화와 공중 나는 새를 보는 대신 성서에 나오는 그 문자만을 들여다 보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자연의 소리를 자연의 소리로 듣기 위하여 퇴보하지 못함을 염려해야 한다.

  셋째, 몸 비우기 -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라는 측면으로 말미암아 수행적 측면이 약화되어 있다. 정신(두뇌)을 강조하고 인간 몸을 부정적으로 보는 기독교 전통의 결과로 말미암아 역사속에서 몸의 자연성을 억압해 온 것이다.(도올 김용옥의 예수 윤리에 대한 비판). 그렇기에 우리 몸의 자연성을 회복하기 위하여서는 침묵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단식행위이다. 위(胃)가 가난해지지 않고는 마음이 가난해지지 않는다. 단식을 통해 우리 몸을 채웠던 찌꺼기들을 모두 비울 때 욕망으로부터 자유한 느낌을 얻을 수 있다. 과불급하지 않게 하루 하루를 살기 위해서는 몸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 몸 자체가 달라지면 오감을 가지고 우주의 모든 것과 교감을 나눌 수 있으며, 그로부터 창조적인 상상력(Imagination)이 생겨날 것이다.

  넷째, 녹색의 감수성 키우기 - 인간은 자연과 교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연 속에서 가능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자연과 관계되어 있다는 의식, 자연이 곧 은총이라는 녹색 감수성을 지닐 수 있다면 그것은 마음이 온유하고 청결한 증거일 것이다. 오늘 우리는 산과 들에서 자라는 풀, 나무, 꽃의 이름들을 불러 줄 수 있는가?  지난해에 피던 꽃이 올해에 피지 않거나, 지난해 자라던 풀이 올해 사라져 없어진 것을 알고 있는가? 자연은 自然이기에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그러나 자연으로부터 배우려면 결코 성급한 마음은 금물이다.

  나무는 나에게 언제나 제일 감명 깊은 설교자였습니다. … 그들은 고독한 사람들과도 같습니다. 어떤 허약함으로 인하여 세상을 등진 은둔자가 아니라 고독하게 된 인간들 같습니다. 마치 베토벤이나 니이체처럼. 나뭇가지 끝은 세상을 향해 살랑거리고 나무 뿌리는 무한함 속에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 나무는 성소입니다. 그들과 이야기하고 그들에게 귀기울일 줄 아는 이, 그는 진리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헤르만 헷세, 『나무들』 중에서.

  다섯째, 마음 다하기 - 보살핌의 윤리. 

  “삶 속에서 가장 훌륭한 방법은 마음을 다해 걷는 것, 마음을 다해 앉는 것, 사물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을 실천함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이 세상 어디에나 아픔이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 일입니다.”(틱낫한 / Thich Nhat Hanh). 

  세상에는 강자와 약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살만한 세상을 만들려면 보살핌과 나눔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를 비롯하여 ‘새로운 가난한 자(New poor)'인 자연은 단순히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 인간들과 공존해야 할 존재들인 것이다. 실상 이들의 가난은 부자들이 더욱 부자가 되기 위한 과정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렇기에 보살핌의 윤리 실천을 위해서 자발적인 가난의 영성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에서 내려, 절제라는 이름의 풍차를 돌려야 하는 것이다.

  보살핌의 윤리는 이런 노력하에서만 가능하다. 인간은 다른 이를 보살핌으로써 영적인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즉 타인을 통해 자기 자신이 구원받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오에 겐자브로의『개인적 체험』) 이런 점에서 고통 받고 있는 타자는 나에게 있어서 초월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가르침인 것이다. 즉 노인, 장애인, 노숙자, 외국인 노동자, 조선족 동포, 기형아로 태어난 아이, 썩어져 가는 강물들에 대한 정성이 바로 예수 자신에 대한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마음을 다하기 위해서는 사려 깊음, 인내 그리고 이해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물질만능주의와 자기중심성에 매몰되어, 더 값진 집과 승용차에 인생을 건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서 이러한 것들을 기대할 수 있을까?

  ※ 2002년 12월 6일(金) YMCA 강살리기 사업과 관련하여 이정배(감신대) 교수께서 강연한 내용을 대학Y 임원 LT에 사용키 위해 새롭게 재구성한 글입니다.

  1. 여기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인간만이 세상에서 최고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음. [본문으로]
  2. 16세기 영국, 확장되는 섬유공업과 함께 더욱 많은 양모가 요구되자, 부르조아 자본가들은 양을 키우기 위해 땅(공유지)에 울타리를 치기 시작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공유지였던 넓은 땅은 개인 통제에 놓이게 되고, 소작농들은 강제로 쫓겨나 도시로 흘러들어가게 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양들이 영국 농촌을 대신 차지하고 들어앉게 되었던 것이다. 토마스 모어 경은 영주 계층의 탐욕과 포악성을 통렬히 비판한 그의 책 『유토피아』(Utopia)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양은 원래 잘 길들여져서 매우 온순하고 매우 적게 먹는 짐승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엄청나게 먹어치우는 사나운 짐승이 되어 바로 인간 자신을 집어 삼킨다. 양은 모든 들과 집과 도시를 소비하고 파괴하고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있다. … 양이 사람을 먹어 버렸다.” 이러한 엔클로저 운동은 더이상 인간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을 상품으로 소유했던 것을 일컫는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의 『생명권 정치학』(Biosphere Politics / 이정배 譯, 대화출판사, 1996) 제1부 4장, “사유화된 자연”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3. 프로이드는 모친 살해를 야기한 사적인 안정감, 엔클로저의 본성을 다음처럼 설명한다 - “어머니 품속에 있는 아이는 어머니와 더불어 大洋的 일치를 이루며 하나의 존재가 된다. 하지만 아이가 성장하면 어미는 의도적으로 아이를 자신과 분리시키려 한다. 이런 분리의 경험은 아이에겐 죽음의 경험과도 같은 아픔이고 두려움이다. 분리에 대한 두려움은 자라면서 아이에게 소유에 대한 집착(죄)으로 바뀐다.” - 따라서 프로이드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소유 의식(엔클로저)은 일상에서 매일 죽음을 경험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이해한다. [본문으로]
  4. 더많은 공유지를 획득하려는 노력을 리프킨은 "생명권 정치학"과 대비되는 "지표권 정치학"이라 일컫는다. [본문으로]
  5. 이점에서 여성 과학자들은 “생명공학이야말로 효율성 신화의 창조를 위해 여성의 몸을 빌리지 않고 혹은 여성의 몸을 왜곡시켜 더 많은 이윤을 창조하려는 남성 중심 생식기술의 마지막 형태이다”(루스 하바드,『생명과학에 대한 여성학적 비판』)라고 말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