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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2011~/중남미따라잡기

슬픔을 간직한 중남미

슬픔을 간직한 중남미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국가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라틴아메리카'라는 용어 이면에 숨어있는 제국주의적 의도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19세기 초반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물러나자 프랑스가 - 앵글로색슨(Anglo-Saxon) 전통을 이어받은 - 미국의 남하를 저지하고 고대 로마제국의 라틴적 요소를 강조함으로써 프랑스 자국의 지배권을 확립하고자 사용한 용어가 바로 '라틴아메리카'이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의 또 다른 표현으로는 이베리아(Iberia)와 아메리카의 합성어인 '이베로아메리카'(Ibero América)라는 용어도 있다. 과거 중남미 사회가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고 이들의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사용되는 표현이다. 이에 반해 베네수엘라의 차베스(Hugo Chávez, 1954~2013)는 '인도아메리카'(Indo América)라는 용어를 주창하기도 했다. 이는 제국주의의 야욕이 담긴 라틴아메리카와 식민지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이베로아메리카 대신 1492년 끄리스또발 꼴론이 '신대륙'을 발견하기 이전부터 이곳에서 줄곧 살아왔던 원주민 인디오(Indio/a)에게 무게 중심을 두어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인디오'라는 용어 자체도 이곳을 인도라고 착각했던 유럽의 편견에 의해 형성된 담론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중남미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보자.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이었던 원주민들은 유럽에서 넘어온 백인들과, 그리고 백인들에 의해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들과 뒤섞이게 되면서 다양한 혼혈을 낳았다. 이들 중 원주민과 백인의 혼혈은 메스띠소(Mestizo/a), 흑인과 백인의 혼혈은 물라또(Mulato/a), 원주민과 흑인의 혼혈은 삼보(Zambo/a)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시차를 두고 이들이 다시 뒤섞이면서부터 점차 그 구분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한 예로 이들이 여러 차례 서로 뒤섞이다 보면 뗀떼넬아이레(Tentenelaire)라고 불리는 집단이 생겨나는데, 그 의미는 '허공에 걸려 있는', 즉 '근본이 없는'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뗀떼넬아이레가 다시 물라따(물라또의 여성)와 만나 자녀를 낳으면 '널(te) 이해하지 못하겠어'(No entiendo)라는 뜻을 지닌 노뗀띠엔도(Notentiendo)라고 불리게 된다.

  이에 대해 갈레아노(Eduardo Hughes Galeano, 1940~)는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Patas arriba : la escuela del mundo al revés, 1998)에서 혼혈로 인한 '백인의 몰락' 정도에 따라 중남미사회에서 차지하는 그들의 위치를 규정하기 위해 이러한 단어들을 만들어 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분류는 혼혈이 곧 유전적 저주임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언급한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유럽에 의한 수탈과 함께 500여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의 시점에서 어느 한쪽에 방점을 찍어 이들의 정체성을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멕시코시티의 삼문화광장(Plaza de las Tres Culturas)[각주:1]에 세워진 비문은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 주고 있다. 

"1521년 8월13일, 꽈우떼목(Cuauhtémoc)이 사력을 다해 방어했지만 뜰라뗄롤꼬(Tlatelolco)는 에르난 꼬르떼스(Hernán Cortés)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 사건은 승리도 아니고 패배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늘의 멕시코를 형성하는 메스티소의 고통스런 탄생이었다."

    우리가 중남미 역사의 현실을 올바르게 직시하고자 한다면 이렇게 혼재되어 있는 그 자체를 중남미의 슬픈 정체성으로 인정해야 한다. 멕시코의 작가, 까를로스 푸엔떼스(Carlos Fuentes, 1928~2012) 또한 <용감한 신세계<(Valiente Mundo Nuevo, 1990)의 서문에서 "우리는 다민족, 다문화로 이뤄진 대륙이기에 '인도-아프로-이베로아메리카'(Indo-Afro-Ibero América)라고 부르는 게 가장 완벽하다"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언어의 경제성을 고려해 볼 때, 의도는 좋지만 너무 길고 사용하기도 불편하지 않은가. 

  따라서 여기서는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배제하면서도 언어의 경제성을 고려한 중남미(la América Central y del Sur)라는 단어로 표기하고자 한다. 물론 멕시코와 미국의 경계인 리오브라보(Río Bravo del Norte, 미국명 : 리오그란데, Río Grande) 이남의 멕시코를 포함해서 말이다.

이 글은 2013년 4월 23일자 <오마이뉴스 - 사는이야기 - 여행>에 함께 기재되었습니다.


  1. 스페인 식민지 이전의 유적과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성당, 그리고 현대 건축물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고 해서 삼문화광장이라고 불린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