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활세계스케치

새마을운동의 특성과 마을만들기운동과의 상관관계

새마을운동의 특성과 마을만들기운동과의 상관관계 

 

1. 序

 

  지난 18대 대선을 앞두고 새마을운동의 ‘부활’을 예고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전남 순천에서 열린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2013년 10월 20일)에 참석하여, ‘새마을운동은 우리 현대사를 바꿔놓은 정신혁명이었고 우리 국민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면서 세계가 주목하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동력이 되었다. 앞으로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새마을운동의 정신을 살려 국민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계기를 또다시 마련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고 천명하였다.[각주:1]
  박근혜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그녀의 아버지인 박정희라고 할 때, 박대통령이 새마을운동 카드를 다시 꺼내 든 것은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순천에서의 축사에서 박대통령은 시대적 변화를 고려하여 ‘새마을운동의 내용과 실천방식을 시대에 맞게 변화시켜 미래지향적인 시민의식 개혁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가야한다’고 단서를 달았다.[각주:2]

 

 

  이에 대해 민주당 박용진 대변인은, 박대통령의 제2 새마을운동이 정권주도의 관변운동으로 전락하거나 여권의 조직력 확대와 연계되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서는 안 될 것이라고 지적하였지만 이날 주요 방송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뉴스 머리기사를 통해 ‘새마을운동 찬양’에 나섰고, 이후 관변단체들을 중심으로 새마을운동과 마을만들기운동의 접목이 시도되면서 마을만들기와 새마을운동이 일란성 쌍태아에 가깝다는 말까지 회자되고 있다.[각주:3]
  새마을운동과 마을만들기운동의 이러한 접목은 주민참여를 기반으로 마을의 물리적, 사회적, 경제적 환경을 개선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마을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마을만들기운동과 자조정신의 기치 아래, 농촌마을의 근대화를 추구하였던 새마을운동이 ‘마을’을 매개로 지역 주민의 역량을 강화하고자 하였던 부분에서 일정 정도 교집합을 이루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글은 ‘성공적’이라고 언급되는 1970년대 농촌새마을운동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마을만들기운동과의 상관관계를 고찰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2.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특성

 

  1961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경제차관을 재원으로 산업화 중심의 경제개발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개발정책은 농촌지역의 소외를 가속화시켰고, 박정희 대통령은 낙후된 농촌지역을 살리기 위해 1970년 4월에 열린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주창하며 농민들의 자조정신을 강조하게 된다.[각주:4]
  근면, 자조, 협동을 근간으로 한 새마을운동은 이후 도시새마을운동, 공장새마을운동, 학교새마을운동 등 전국적으로 확장되었고 운동(사업)의 영역도 단순히 마을가꾸기를 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영역에 걸친 일종의 사회개혁운동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1970년 5월, 새마을운동 추진방안이 마련되면서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박대통령의 사망(1979년)과 함께 실질적으로 종식되었고 그 성과 또한 농촌새마을운동에 국한되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농촌사회와 농촌주민의 대다수를 운동에 동원하는데 성공하였던 농촌새마을운동과는 달리 도시새마을운동이나 직장새마을운동, 학교새마을운동 등은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참여하는 관제운동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다른 하나는 독재자 박정희를 정점으로 모든 정치, 관료조직들이 총동원되어 수행되었던 농촌새마을운동이 최고 지도자의 사망과 함께 그 동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각주:5]
  이러한 새마을운동은 1차 연도(1970년10월~1971년3월)에 전국 마을을 대상으로 정부가 시멘트를 336포씩 무상지원하면서 본격화되었다.[각주:6] 내무부는 시멘트 무상지원의 조건으로 반드시 마을공동사업에 써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그 결과 16,600개 마을들이 좋은 성과를 올린 것으로 평가되었고 2차 연도에는 성과가 좋은 이들 마을들을 대상으로 시멘트 500포와 철근 1톤씩을 추가로 지원하면서 자발적인 협동과 자주적인 노력을 강조하였다. 새마을운동의 이러한 선별지원 방식은 1973년 정부에 의해 - 전국 마을의 참여도와 발전수준에 따라 - 기초마을(18,415개), 자조마을(13,943개), 자립마을(2,307개)로 분류되어 체계화되었고[각주:7] 정부는 마을 승급단계를 설정하여 기반조성 ➛ 자조발전 ➛ 자립완성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마을주민들의 자조성과 주체성, 그리고 자발성을 유도하였다.[각주:8] 내무부는 이 시기를 지붕개량 등 기초적인 마을 환경 개선사업을 통해 새마을운동의 실천의지를 자극ㆍ점화시켰던 새마을운동의 기반조성 단계라고 평가하고 있다.[각주:9]

 

 

  하지만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새마을운동은 초기의 농촌사회개발운동을 벗어나 국가 주도의 정치적인 국민운동으로 변질하게 된다. 독재자 박정희는 제1차 새마을지도자대회(1973년 11월 22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마을운동은 곧 10월 유신이요, 10월 유신은 곧 새마을운동이다. … 즉 새마을운동은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위한 실천도장이요, 참다운 애국심을 함양하기 위한 실천도장인 동시에 10월 유신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실천도장이다.”[각주:10]

 

  이와 관련하여 새마을운동역사연구원 원장을 역임한 정갑진은 농촌부흥을 위한 국가정책으로 시작된 새마을운동이 한국사회의 변혁을 통해 국가를 근대화시키려는 범국민적인 사회운동으로 발전되었다고 평가하면서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성과로 첫째 빈곤퇴치와 복지농촌 기반 조성, 둘째 국민정신개혁운동 추진을 통한 조국근대화 이념 제공, 셋째 국가경제개발운동으로서의 기여를 꼽았다.[각주:11]
  물론 새마을운동이 지붕개량, 마을 안길 고치기 등 농촌의 생활환경개선을 비롯하여 소득증대에 있어 소정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❶ 군사독재정부의 지도(指導) 아래, 하향식으로 이루어진 주민 참여는 농민의 온전한 자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하지 못했다.[각주:12] 『그들의 새마을운동』의 저자, 김영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마을운동이 농촌 근대화 운동을 넘어선 박정희 정부의 종합적 지배전략이라고 했을 때, 운동의 수행 주체인 농민들은 자율적 존재가 아니라 동원된 주체들이다. 그리고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의 국민운동은 대중들을 정치적 목적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든 대중 동원 메커니즘이다."[각주:13]

 

  뿐만 아니라 ❷ 1970년대 새마을운동은 저곡가정책, 외국농산물 수입, 농가부채 등 1970년대 농촌의 구조적 문제를 도외시하였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각주:14] 나아가 ❸ ‘근대화는 곧 새마을운동’이라는 도식 아래, 각 마을이나 지역이 지닌 문화전통 및 역사성 또한 표준화된 근대의 논리에 의해 부정되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정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마을운동이 없앤 게 사회적 경제였다. 사회적 경제는 인류 탄생과 함께 늘 존재했다. 서로 돕는 게 사회적 경제다. 예전엔 식량을 공유하고 품앗이, 두레 같은 조직이 마을마다 있었다. 해방기 이후는 조합의 천국이었다. 정부를 믿을 수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근데 새마을운동이 이걸 다 없애버렸다.”[각주:15]

 

 

3. 結 : 마을만들기운동과의 상관관계

 

  지난 6월 1일, 경주에서 폐막된 제66차 유엔 비정부기구(NGO) 컨퍼런스의 선언문에 ‘새마을운동’을 넣으려던 경북도의 시도가 ‘새마을운동은 정부 주도의 강제동원형 의식개조운동으로, NGO 활동과는 무관하다’고 반발한 국내외 시민단체들에 의해 좌절됐다.[각주:16][각주:17]

 

 

  물론 새마을운동은 군사독재정부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지만 마을활성화 사업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 또한 자명한 사실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새마을운동은 마을만들기운동과의 접점을 지니고 있다. 특히 새마을운동에 우호적인 단체와 연구자들은 새마을운동의 경험과 장점을 수용하여 마을만들기운동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하지만 마을만들기운동은 - 새마을운동과 달리 - 도시연대의 걷고 싶은 서울만들기운동(1996년)과 대구 삼덕동의 담장허물기운동(1998년)을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된 시민사회와 주민 주도의 상향식 운동이다.[각주:18] 이러한 마을만들기운동은 - 초기 새마을운동처럼 - 마을의 물리적 공간의 변화를 주도했고 부분적이지만 마을기업, 사회적기업 등과 연계되면서 경제적으로 도움이 된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❶ 이화벽화마을의 랜드마크였던 해바라기 벽화와 잉어계단이 지난 3월, 일주일 상간을 두고 주민에 의해 지워졌던 것처럼 주민이 외부화 된 사례들도 상존하고 있다. 또한 ❷ 새마을운동이 농촌의 구조적 문제를 도외시 했듯이 마을만들기운동은 마을 해체의 원인에 대한 근원적 진단보단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성과에 집착한 부정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나아가 ❸ 마을만들기운동 또한 지역의 장소성이나 역사성을 무시하고 마을을 획일화하는 경향도 드러나고 있다.
  물론 마을만들기운동과 새마을운동 사이에는 ‘87년 체제’라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형식적 유사성을 띌 순 있겠지만 제도적 동형화(Isomorphism)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다. 하지만 마을만들기운동이 주민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네트워크의 참여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지역주민의 공통 관심사에 기반한 마을만들기운동을 주민 상호간의 합의를 통해 추진해야 하며, 단기적ㆍ외형적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함으로써 다양한 주체들(주민, 행정, 전문가, 시민단체) 간의 수평적 협력 체계를 건강하게 구축해야 한다. 나아가 마을만들기운동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마을만들기 전문가들을 양성해야 하고, 도시계획과의 연계성이 제도적으로 확보되어야 하며, 중앙정부와 광역시, 그리고 지자체 간의 합리적인 역할 분담을 통해 체계적인 지원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각주:19]

 

  1. 박정규 정리, 2013. 10. 20, “박대통령 ‘2013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축사”, <뉴시스> [본문으로]
  2. 박정규 정리, 2013. 10. 20, “박대통령 ‘2013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축사”, <뉴시스> [본문으로]
  3. 서찬수, 2014,『대구 도시새마을운동 발전방안-대구 마을만들기를 중심으로』, 대구경북연구원, 63쪽. [본문으로]
  4. 1969년 8월 4일, 경북 청도군 청도읍 신도1리의 수해복구 현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다른 마을과 달리 생활환경이 크게 개선되어 있는 마을의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마을 관계자는 수해로 무너진 마을을 복구해야 할 바에야 이 기회에 좀 더 깨끗하고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자는 마을총회의 결의에 따라 마을주민들이 자진해서 협동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그 경위를 설명하였고, 이에 감동한 박대통령이 1970년 4월 22일,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청도읍 신도1리를 예로 들면서 농촌의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제안하게 된다. [본문으로]
  5. 물론 1979년 신군부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 또한 새마을운동중앙본부(1980년)를 설치한 후, 새마을운동을 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전환하고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1980년)을 제정하는 등 ‘민주복지국가의 건설’을 위한 국민운동으로 발전시키고자 하였지만 활성화에는 실패하였다. 박진도ㆍ한도현, 1999, “새마을운동과 유신체제”,『역사비평』, 제47호, 38~39쪽 참조. [본문으로]
  6. 시멘트 무상지원은 당시 시멘트업계의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측면이 없지 않지만 어쨌든 이것은 농가 호당 약 4포에 해당하는 상당한 양이었다. [본문으로]
  7.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1973,『새마을운동종합지침』, 5~6쪽 ; 내무부, 1980,『새마을운동 10년사』, 213쪽. [본문으로]
  8. 김동윤ㆍ이경록, 2015, “새마을운동과의 비교를 통한 마을만들기 사업의 실천전략 연구”,『한국지역개발학회지』, 제27권 제5호, 31쪽. [본문으로]
  9. 내무부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기반조성 단계(1971~1973년), 자조발전 단계(1974~1976년), 그리고 자립완성 단계(1977년 이후)로 구분하였다. 내무부, 1979,『새마을운동 : 시작에서 오늘까지』, 8쪽. [본문으로]
  10. 내무부, 1973,『새마을운동 : 시작에서 오늘까지』, 18쪽. [본문으로]
  11. 정갑진, 2008,『1970년대 한국 새마을운동의 정책경험과 활용』, 한국개발연구원, 1쪽, 149~152쪽. [본문으로]
  12. 그렇기에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으뜸 덕목인 ‘자조’는 위로부터 행해진 지도의 한계선 안에서만 유효했다는 김보현의 지적은 온당하다. 김보현, 2011, “박정희시대 지배체제의 통치 전략과 기술 : 1970년대 농촌새마을운동을 중심으로”,『사회와역사』제90집, 60쪽. [본문으로]
  13. 김영미, 2009,『그들의 새마을운동』, 푸른역사, 336쪽. [본문으로]
  14. 새마을운동은 농촌의 문제를 사회구조적인 이유에서 찾지 않고 농민의 나태, 농민정신의 결여에서 찾았다는 데서 기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박진도ㆍ한도현, 1999, “새마을운동과 유신체제”, 77~78쪽. [본문으로]
  15. 서어리 정리, 2013. 3. 7, “박근혜의 새마을운동이냐, 박원순의 사회적경제냐”, <프레시안> [본문으로]
  16. 유신모, 2016. 6. 1, “‘미화 논란’ 새마을운동 세계화... 국내외 시민단체가 제동”, <경향신문> [본문으로]
  17. 삭제된 문구는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의 새마을운동은 농·어촌과 도시 간의 경제적 및 사회 기반적 격차를 줄이는 데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모범적 시민운동이었다. 1970년대부터 수십 년간 국가성장을 도왔을 뿐 아니라 더욱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우리는 세계시민정신의 맥락에서 2030의제를 달성하기 위해 새마을운동을 빈곤퇴치와 개발의 모델로 제안한다." 허완, 2016. 6. 1, “‘새마을운동’을 유엔 NGO 컨퍼런스 선언문에 넣으려던 경북도의 시도가 좌절되다”,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본문으로]
  18. 1995년 민선 지방자치의 부활 이후, 행정과 시민운동영역에서 정착되기 시작한 ‘마을만들기’라는 개념은 일본의 마찌즈꾸리(まちづくり)를 변용시킨 것으로, 지역 공간을 주민들이 주체적으로 디자인해가는 활동을 가리킨다. 김찬호, 2000, “일본의 도시화 과정에서 마을만들기의 전개와 주민 참여”,『도시행정학보』, 제13권 1호, 96쪽. [본문으로]
  19. 김세용 外, 2013, “우리나라 마을만들기의 현재와 앞으로의 방향”,『도시정보』, 제371호, 17~18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