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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0년대 민주화운동과 YMCA운동

8,90년대 민주화운동과 YMCA운동


 

1. 序 - 8,90년대 민주화운동


  유신체제의 몰락을 가져온 1979년 10월 26일 이후부터 1980년 5월 17일에 이르기까지 민주화에로의 이행가능성을 열었던 ‘서울의 봄’은 12.12 쿠데타와 1980년 5.17 비상계엄조치를 거쳐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신군부의 등장으로 좌절된다.
  이렇게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1980년대 초반의 경제적, 정치적 위기를 넘기면서 체제의 재정비와 권력의 공고화를 이룬 후, 국민의 정치경제적 불만을 일정 정도 체제내로 수렴하게 되는데, 그 당시의 대표적 조치가 바로 해직교수 복직, 제적학생 복교 및 대학에 상주하던 경찰 및 정보원 철수, 그리고 일부 정치활동 피규제자에 대한 해금조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화국면은 - 전두환 정권의 의도와는 달리 - ‘전국학생총연맹’ 및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의 결성, 그리고 신한민주당의 창당 등으로 나타나면서 급기야 1985년 2월, 제12대 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하게 되고, 이와 함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쟁점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이에 당황한 전두환 정권은 다시 탄압을 강화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박종철 고문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이를 은폐하면서 개헌논의를 유보한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게 되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로 말미암아 범국민적 분노가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짐으로써 결국 6.29선언을 이끌어내게 된다. 특히 6월 민주화항쟁은 사회여론의 주도층인 화이트칼라 등 중간계급의 대대적인 참여로 이루어지면서 민중의 개념을 대체하는 본격적인 시민사회 개념과 함께 시민운동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시민운동의 급속한 발전 배경에는 세계사적인 변화 또한 무관하지 않다. 즉 냉전 체제의 해체로 이분법적인 대결 구도가 무너지고 인류가 처한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들이 광범위하게 생겨나게 되면서 환경문제나 인종갈등, 종교간 분쟁, 투기자본과 빈곤문제 등 이념 분쟁이 주된 갈등일 때와는 다른 문제들이 부각되었던 것이다.
  또한 한국 사회의 정치적 지형에 있어서도 여전히 정치를 독점하고 있는 지역중심, 보스중심의 정당들이 새롭게 제기되는 사회 문제들에 응답하지 못하고 지체하고 있을 때, 시민운동 세력들은 주택, 환경, 교통, 소비자문제 등 새로운 사회 문제들에 대해 발언하고 행동하면서 반사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를 통하여 - 3당 야합이지만 - ‘문민정부’가 등장하면서 군사독재의 잔재가 점차 사라지고, 김영삼 정권은 세계화 구상을 통한 일류화를 주창하게 된다. 하지만 정부-재벌-은행의 골 깊은 삼각 고리로 인해 시장 자체가 왜곡되어 있었기에 재벌개혁 등 철저한 구조개혁을 통해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여야 했다.

  그래서 김영삼 정권은 금융실명제의 전격 단행, 국가중립성 및 노사자율성을 근간으로 하는 신노동정책 발표, 기업공개, 소유분산 및 기술개발투자 등의 재벌규제정책을 내어 놓았다. 결국 세계화의 흐름과 함께 국가의 민주화가 점차 이루어지면서 그동안 국가의 통제 하에 종속되었던 경제영역의 독립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재벌로 대표되는 대기업들이 차츰 제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영역의 독립은 시장에 대한 국가의 관료적 통제 대신, 시장의 논리를 견제할 수 있는 사회세력을 요청하게 되었고, 이는 시민사회의 활성화를 불러 일으켰다. 이와 더불어 지방자치제도의 본격적인 실시는 시민운동을 더욱 가속화시켰고, 2000년 4·13총선에서의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은 시민운동의 정점을 이루게 된다.

2. 80년대 민주화투쟁과 YMCA운동 


  80년대 들어 한국YMCA는 상업주의적 소비문화와 쾌락적 유흥문화, 물질만능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하는 풍토 속에서 시민독서운동을 전개시키는가 하면, 사회교육 및 각종 캠페인을 통해 시민의식 개발에 힘쓰게 된다. 이 당시 한국YMCA의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직종별 회원운동의 형태로 나타난 중등교육자모임과 농민지도자교육 및 조직운동, 그리고 서울Y를 중심으로 파급된 시민중계실 사업을 들 수 있다. 

  먼저 80년대 초반에 구성된 ‘YMCA중등교육자협의회’는 교사들의 호응과 함께 25개 지역 YMCA에서 500~600명의 중등교사가 참여하는 조직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1986년에는 ‘전국교사협의회’로 발전되어 급기야 1988년에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1978년, 서울YMCA에서 시민권익옹호운동의 일환으로 개설된 시민중계실은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국YMCA로 확장하게 된다. 이 당시 시민중계실에서 다룬 주요 문제들로는 노인보호문제, 산업재해 보상제도문제, 사설금융업소 횡포문제, 계 파동의 문제점과 대책, 소액심판청구제도 소가한도액 인상문제, 장애자 재활사업, 의료사고대책문제, 연립주택부실공사 및 분양시문제, 전세입주자 보호문제, 보험회사 외무사원 횡포와 약관횡포문제, 피라미드식 상품판매 횡포문제, 대리점 계약 사기문제 등 서민생활과 밀접한 문제들이었다. 이러한 시민중계실의 활동은 점차 한국YMCA의 대표적인 운동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1975년 이후, 한국YMCA는 농민의 협동화(조직화)와 농촌의 민주화(의식화)를 통한 농촌개발을 목표로 하여, 협동조직의 결성 및 이를 위한 협동교육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부락 단위 소모임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농촌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다. 특히 전국 단위 농민조직을 갖추지 않은 채로 부락, 지역, 전국 단위 농민교육 이수자들을 대량 배출해 냈으며, 1985년 이후에는 매년 장기 전문과정(15일)의 간부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농민 대중속에 뿌리내리는 농민 조직 기반과 운동 지도부의 역량을 부단히 확충해 왔다. 결국 이러한 한국YMCA의 농촌운동을 근간으로 1990년 5월에는 ‘전국농민운동총연합회’가 탄생한다. 

  이로 말미암아 이 시대 한국YMCA운동은 ‘발판론’(Platform Theory)이라는 용어로 표현되어지기도 했다. 즉 다른 많은 운동체들이 YMCA를 발판 삼아 딛고 넘어가면서 발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YMCA운동의 정체성을 찾고자 등장한 것이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운동론’이다.

  강문규는 1984년 제10회 YMCA 목적과 사업연구협의회에서 YMCA가 특정 신분이나 특정 계층을 겨냥하기보다는 포괄적인 하나의 사회운동체 형성을 위한 의식화된 시민운동으로 변혁해 가기 위해서는 어소시에이션 운동론의 자각 밑에서 정적이고 개별적인 ‘회원’을 운동의 추진세력으로 탈바꿈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YMCA는 특정계층을 묶는 이익집단의 일사불란한 노동운동과도 다르고 학생운동과 같이 이념적으로 뭉치는 것도 아니고 복합적인 여러 계층의 사람들의 조그마한 뜻을 묶어 Y라는 기구가 이를 뒷받침하면서 운동화하는 것이다. 때문에 다양화한 산업형 대중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포괄적인 운동의 접근방법이 유효하다.  대한YMCA연맹, 『한국YMCA 이념추구Ⅹ-YMCA 운동론의 전개』, (제10회 한국YMCA 목적과 사업연구회 보고서, 1984. 8), 42-43.  


3. 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YMCA운동 


  이러한 한국YMCA는 1987년 전두환정권의 4·13호헌 조치와 관련하여 개헌의 역사적 당위성을 주장하였으며, 그 해 12월 대통령선거 기간에는 공정선거 감시단을 조직하여 민주화를 위한 자유·공정선거 시민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87년 6월 항쟁이후, 한국YMCA는 전국적으로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노동조합을 뒷받침하기 위해 노동조합운동의 현황과 과제, 노동조합의 조직활동, 회의진행, 노동법해설, 지도력 등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 간부교육’을 3년간 실시하여 약 1,400명의 노동조합 간부를 교육해 낸다.

  더불어 대통령 직선제와 함께 절차적 민주화가 형성된 이후, 통일을 위한 주체적 역량의 형성을 위하여 평화시민운동을 YMCA의 중점사업으로 추진함으로써 통일의 중요성과 함께 민족구성원간의 상호이해를 도모하게 되는데, 이러한 일련의 운동은 1990년 한국YMCA 평화통일운동 선언 발표로 나아가게 된다. 
  이와 함께 한국YMCA는, 우리가 지금까지 끝없이 추구해온 ‘풍요한 삶’과 번영을 오늘과 같은 무제한의 자원수탈로는 지탱해 갈 수 없다는 기본인식하에, 환경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여나가게 된다.

   먼저 한국YMCA는, 환경 관련 정보와 자료의 공급 및 지도력 개발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환경지도자교육을 통하여 지역 환경운동가를 양성함과 동시에 연맹 부설 국제환경정보교육센터를 개설하여 각종 조사연구사업을 펼치게 된다. 또한 환경친화적인 생활양식의 보급, 확산을 위해 생활환경실천지침서, 격월간『환경리포트』, 리우 지구환경회의 자료집 등을 발간하는가 하면, 국내외 환경정보네트워크의 형성을 위하여 힘을 기울이는 등 한국YMCA 중심사업의 하나로 환경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가게 된다. 

  한편, 한국YMCA는 외국농산물 수입개방에 대처하여 우리 농업을 보호하고 농민의 피해를 극소화시키기 위해 ‘우리농산물먹기운동’을 벌여나간다. 이를 위해 한국YMCA는 수입농산물의 과중오염실태를 적극 홍보하고 수입식품 불매운동을 소비자·농민단체들과 연대하여 추진하는 한편, 생산자와 소비자간의 직거래운동을 포함하는 생활협동조합을 조직하게 된다.
  이후 우리농산물먹기운동은 생협운동으로 발전하여 지역YMCA들의 생협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전개된다. 이와 함께 한국YMCA는 양담배불매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는 청소년유해환경 추방이라는 목적과 어우러져 담배자판기추방을 위한 조례제정운동으로 나아갔으며, 부천YMCA와 같은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한국YMCA의 활동들은 지방자치제도의 실시와 함께 더욱 본격화된다. 특히 전국에서 기초의회가 일제히 출범하던 91년에는 의정에의 대안적 참여, 행정부와 중앙정치로부터의 보호․비판을 위해 의정지기단을 구성하여 활동을 펼쳐 나갔으며, 선거기간에는 바른 선거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공정선거 캠페인 및 후보자 정책토론회 개최, 선거모니터 활동 및 부정선거고발센터 운영 등 다양한 활동들을 펼쳐나가게 된다. 

  특히 지방자치시대를 맞이하여 지역공동체 형성을 통한 시민참여 주민운동이 절실하다는 공감아래 - 21세기 지역만들기 시민운동의 일환으로 - 21세기에 걸맞는 지역의 미래상 만들기와 시민참여의 영역별 지표만들기운동 및 아름다운 마을만들기 시민운동을 전개하여 읍·면·동 등 생활현장에서 풀뿌리조직 및 생활공동체를 형성하는 주민참여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더불어 생활개혁운동의 일환으로 제례문화 개선 및 건전한 가정의례 정착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매장 및 묘지 등에 관한 법률’의 개정에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된다.

4. 結 


  1980년대 한국YMCA운동은 기구 운영체제에 있어서나, 프로그램과 지도력 면에서나, 자산규모나 회원운동 등 모든 분야에 있어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어 내었다. 특히 유지지도력 및 실무지도력들의 소신 있는 참여를 통해 YMCA의 기틀과 위상을 더욱 굳건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YMCA 내의 각종 소그룹 모임이나 교육프로그램이 당시 재야운동이나 민중운동의 근거가 되면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및 전국농민운동총연합회의 모태가 되었다. 따라서 80년대의 한국YMCA 운동은 사회의 민주화 도정에 일익을 담당하였던 시기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지방자치제도의 실시와 함께 한국YMCA는 다기한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YMCA의 이념을 현장화 시키고자 노력하였지만 내부적으로는 - 대도시 YMCA를 중심으로 - 정부로부터의 기관 위탁 등을 통하여 그 규모가 상당부분 비대화됨으로써 조직 내부의 갈등들이 야기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직의 경영, 운영, 유지가 단체의 주요 관심사가 되어 버리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외부적으로는 YMCA운동이 ‘백화점식 운동’이라는 비판이 가해지기 시작하는데, 이는 YMCA운동이 모든 분야에 있어 관계치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전방위적으로 그 역할을 담당함으로 말미암아 YMCA운동의 특성을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기도 하였다. 결국 이러한 비판들은 한국YMCA의 자기성찰과 자기반성, 나아가 21세기 한국YMCA의 나아갈 방향에 대한 정체성 탐구로 이어지게 된다. 

  강순규, 『한국시민사회 형성과정에서의 YMCA운동 고찰- 시민사회론을 중심으로』, (2003년 한국YMCA 간사논문) 중 일부 수정 보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