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는 영화를 만들고 영화는 20세기를 구성한다.
1895년이 영화의 시작인 연유는 그 해 12월 28일에 프랑스의 뤼미에르(Lumiere) 형제가 만든 <열차의 도착 The Arrival of a Train at the Station>이 파리의 그랑카페에서 대중에게 처음으로 상영되었기 때문이다.
<열차의 도착> 1895년, 뤼미에르 형제
그러나 1895년 이전에도 카메라와 영사기는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1891년 에디슨이 만든 핍쇼(peep show)라고 불리우는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에디슨은 영화가 일시적인 유행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영화를 스크린에 투사하는 시스템을 개발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영화는 1903년까지 대부분 단순한 기록물들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차츰 서사형식의 도입과 함께 엄청난 기술의 변화를 거치면서 발전하게 된 영화는 특히 죠르쥬 멜리에스(Georges Melies)를 통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멜리에스는 어느날 오페라극장 광장에서 촬영을 하고 있을 때 필름이 갑자기 움직이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카메라를 다시 작동할 수 있게 해놓고는 무심코 그 필름을 계속 돌렸는데 집에 돌아와 현상을 하게 되었을 때 멜리에스는 카메라가 멈추기 직전까지 나타났던 마차가 다시 카메라가 작동했던 부분부터는 갑자기 장의차로 둔갑해 버렸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기적 같은 사건으로 인해 멜리에스는 스톱모션(stop-motion)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고, 그는 연이어 페이드(fade in/out), 디졸브(dissolve), 매스킹(masking), 슈퍼임포지션(superimposition), 슬로우 모션 / 패스트 모션(slow and fast motion), 역모션(reverse motion) 등까지도 발견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오늘날 지하 영화작가들 대부분은 그들의 선조로서 그리고 영웅으로서 멜리에스를 꼽고 있다.
<달나라여행> 1902년, 죠르쥬 멜리에스
쟈네티는 그의 책 <영화의 이해>에서 이러한 멜리에스를 표현주의적 전통의 창시자로 간주하면서 뤼미에르 형제를 사실주의적 전통의 창시자로 언급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초기의 단편영화들을 상영하는 5센트 극장(the nickelodeon)이 1905년에 개관되어 성행을 이루었는데 - 1908년에는 5센트 극장이 만여 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 이 당시 상영된 영화들로는 에드윈 포터(Edwin S. Porter)의 <미국소방수의 생활 Life of an American Fireman>(1903)과 <대열차 강도 The Great Train Robbery>(1903)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오늘날 서부극의 효시로 불리우는 <대열차 강도>는 14개의 씬(Scene)으로 구성되어 극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대열차강도> 1903년, 에드윈 포터
또한 미국영화 초기 작가 중에서 가장 걸출한 인물로는 - 영화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 그리피스(D.W. Griffith)를 꼽을 수 있다. 그리피스는 1908년 감독으로 데뷔하여 <국가의 탄생 The Birth of Nation>(1915), <편협 intolerance>(1916) 등에서 무성영화의 기본문법인 롱쇼트, 미디엄쇼트, 클로즈업의 체계적 사용, 쇼트들의 편집, 편집을 통한 속도변화, 영화길이의 연장 등을 확립했다.
이러한 그리피스의 편집방법은 당시 매우 경제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상호관련이 깊은 쇼트들을 실제 완성작품에서의 시공간적 위치와 상관없이 - 촬영 일정표에 따라 - 짧은 기간동안 배우들이 나오는 씬을 몰아 찍는가하면, 익스트림 롱 쇼트나 조연배우들, 그리고 사물의 클로즈업 등 돈이 덜 드는 부분들은 보다 편리한 시간에 찍을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편집양식은 1920년대 소비에트 몽타주 양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은 토마스 딕슨(Thomas Dixon)의 소설 <동향인 The Clanssman>과 그로부터 만들어진 연극에 기초하고 있으며, 딕슨의 <표범의 얼룩 The Leopard's Spots>과 다른 자료들에서도 조금씩 빌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그리피스 자신의 관점에서 다시 재창조된 작품이다.
제작비로는 110,000달러가 들었으며 - 그 당시 최고 제작비가 23,000달러 - 6주의 리허설, 1914년 7월부터 10월까지의 촬영, 그리고 편집에 3개월이 걸렸다. - 당시 평균 제작기간이 6주 이내 - 완성되었을 때 <국가의탄생>의 상영시간은 3시간이었으며, 줄곧 조셉 칼 브리엘(Joseph Carl Briel)이 특별히 작곡한 교향곡과 함께 펼쳐진다.
이러한 웅장한 스펙터클로서의 <국가의 탄생>은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의 남부와 북부, 전쟁 그 자체, 그리고 전쟁 이후 남부에서의 재건시기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
특히 그리피스는 이러한 전체적인 착상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러한 부분들을 구성하는 시퀸스들, 그리고 그 안의 씬들과 그 씬들을 구성하는 쇼트들에 이르기까지 그 선택과 균형을 아주 체계적으로 배열해 나간다. 또한 카메라는 각 쇼트들의 의미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곳에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이 쇼트들의 편집은 관객들의 정서적 긴장을 잘 유도하고 있다. 특히 그리피스는 19세기 문학의 전례를 끌어들여 영화의 등장인물을 가상의 인물과 역사의 인물들로 뒤섞음으로써 그 당시의 상황을 더욱 효과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문제가 된 것은 흑인의 폄하를 인한 인종차별주의였다. - <국가의 탄생>에서 나타나는 명백한 인종적 편견은 엄청난 반박과 때로는 폭동까지 불러 일으켰지만 이러한 악명이 더 많은 관객들을 끌어들였다고 한다. - 나중 그리피스는 이러한 비난에 대해 자신을 옹호하기 위해 <국가의탄생>보다 훨씬 더 정교한 계획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편협>(1916)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