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즘의 현저한 특징은 아방가르드 현상이다. 말하자면 소수의 자의식적 그룹의 작가들과 예술가들이 에즈라 파운드의 말대로 예술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기존의 관습과 예의를 거부하며 그들은 새로운 예술적 형식과 스타일을 창조하고 그동안 무시되어 왔거나 금지되어 왔던 것들을 소개한다. 흔히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자신들을 전통 질서로부터 소외된 사람들로 생각하며, 전통에 대항해 스스로의 자주성을 주장한다. 그들의 목적은 관습적인 독자들의 감성에 충격을 주며, 지배적 부르주아 문화의 규범에 도전하는 것이다.” - M.H.Abrams
"아방가르드의 중요한 덕목은 열림의 시학이다.” - 박상진
<기억의 집념> (1931년),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10년대 유럽에서 전위(前衛) 혹은 최첨단을 자처하며 스스로를 ‘아방가르드’ - 본대(本隊)보다 앞서 전방(前方)의 정찰임무를 띤 척후병 - 로 불렀던 예술가 집단이 탄생했다. 이런 이름이 탄생한 배경에는 ‘new'를 뜻하는 'modern'이란 말로 자신들을 지칭하며, '남보다 앞서가기'를 우선적인 가치로 삼아 온 현대인들의 집단적인 가치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집단인 아방가르드는 유일하고 영원하기를 요구하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 그렇기에 어떤 면에서는 역설적으로 정작 청산되고 극복되어야 할 것 또한 다름 아닌 아방가르드 그 자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모든 아방가르드는 전통과 관습, 그리고 헤게모니는 물론 자기보다 앞서 있는 또 다른 아방가르드까지도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방가르드 자체가 언제나 열린 체계 속에서 어느 곳에도 머무르지 않고 언제나 새로움을 향해 변증법적으로 나아가는 예술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래야만 항상 전위에 설 수 있고 자기 사명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1910년대 유럽 각지의 <입체파>, <미래주의>, <표현주의> 등의 예술운동과 더불어 탄생하여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으로 발전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네오다다>, <네오아방가르드>, <포스트아방가르드>, <팝 아트>, <환경예술>, <해프닝>, <포퍼먼스>, <풀럭서스> 등에 이르기까지 복잡다기하게 전개된 예술운동의 총체로서의 아방가르드는 그 당시 부르주아들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을지라도 오늘날에는 그것 자체가 하나의 전통이 되다시피 하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문예사조의 한 현상으로서의 아방가르드는 분명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방가르드를 단순한 문예사조의 한 흐름으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워지고자 하는 하나의 예술정신으로 파악한다면, 아직도 "아방가르드의 정신"은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죠르쥬 멜리에스(Georges Melies)에 의해 시작된 전위영화에 대해서 영화사가들은 일반적으로 네 개의 시기로 구분한다. ① 1920년에서 1931년에 이르는 베를린과 파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시기, ② 대략 1940년에서 1954년에 이르는 대부분 미국이 중심이 되었던 시적이고 실험적인 시기, ③ 1954년에서 1960년대 말까지의 지하 시기, ④ 그 이후부터 전위영화의 주류를 이루게 된 구조주의적 영화이다.
<달나라여행> (1902년), 죠르쥬 멜리에스(Georges Melies)
본 글은 1920년대 프랑스 아방가르드 영화 연구에 목적을 두고 있기에 여기서는 전위영화의 첫 시기인 1920년대 프랑스 전위영화를 중심으로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1921년부터 1931년 사이의 10여 년 동안 영화에서의 독립적인 예술운동이 전개되었다. 전위영화(avant-garde film)라 불리우는 운동이 그것이었다. … 영화에 있어서의 이러한 예술운동은 조형예술상의 표현주의, 미래주의, 입체파, 다다이즘과 병행하고 있었으며 비상업적, 비구상적인 한편 범세계적인 것이었다.” - Hans Richter
2-1. 1920년대 프랑스 영화산업의 시대적정황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영화 종사자들은 징집되고 회사들은 전시 업무로 전환됨으로 말미암아 수출이 중단되는 등 제1차 세계대전은 프랑스 영화산업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대표적인 회사였던 빠떼 프레르(Pathe Freres)와 레옹 고몽(Leon Gaumont)은 극장 체인까지도 지배하고 있었기에 그곳에서 상영될 영화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1915년부터 미국 영화들이 물밀듯이 프랑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1917년에는 헐리우드 영화가 프랑스 국내 시장을 지배하게 되어 1920년대엔 자국 영화보다 여덟 배나 많은 할리우드 영화를 프랑스 관객들이 보았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프랑스 영화업계는 시장을 되찾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 즉 헐리우드 제작방식과 장르의 모방까지도 시도하였는데, 예술적인 면에서 가장 의미가 있었던 것은 역시 프랑스 전위영화의 발전이었다. 프랑스에서의 전위영화는 에밀코올(Emile Cohl)과 쟝 뒤랑(Jean Durand)에 의해 확립된다. 특히 이들에 의해 확립된 전위영화는 매체의 사용과 재료에 있어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쉬웠다는 것, 그리고 관객이 실험을 잘 받아들인다는 것 때문에 더욱 촉진되게 되었다.
2-2. 전위영화의 미학과 토대
영화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극영화, 기록영화 그리고 전위영화가 그것이다.
그 중 전위영화는 영화의 예술적 가능성을 추구함으로 말미암아 오락적인 요소나 교양적인 요소를 기대하는 관중들을 당황케 만드는 영화이다. 그렇기에 전위영화는 모든 영화에서 하나의 정확한 줄거리와 그 해결을 요구하는, 수학문제를 풀듯 정확한 해답을 입장권과 교환해 가려는 관객의 ‘이해’에 대한 강박관념을 의식적으로 무시하면서 새로운 영화언어를 창조해 나갔다. 특히 적은 예산으로 제작에 임하였기에, 이들 전위영화 감독들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자신들이 직접 촬영과 편집을 도맡아서 하였다. 그러면서 이들 감독들은 자신만의 언어와 상징을 통해 그들의 작품을 전개시켜 나갔다.(인과율 파괴, 비서사적인 입장, 운율적 편집, 시점편집, 자체적인 영화양식 등)
피에르 조스는 이러한 전위영화의 지배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① 관객에게 아첨하는 것의 단념
② 모든 문학적 내지는 예술적인 전통을 거부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욕구
③ 관습적인 주제와 기교를 무시하고 자유로운 몽상과 시적인 흥을 위해 미학적 내지는 도덕적 모든 구속을 초극하려는 것
④ 지성과 윤리와 양식의 세계에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초현실성을, 새로운 영화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창조하려는 것
이러한 전위영화는 1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전란에서 겪은 가치관의 붕괴와 위기(문명화에 대한 격렬한 저항), 과학에서 시작된 지적인 진보주의 - 막스 프랭크(Max Planck)의 양자역학, 앨버트 아인쉬타인(Albert Einstein)의 상대성이론,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의 수학과 철학이론 - 의 시간과 공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시공의 동시성), 또한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에 의해 주창된 - 무의식이론과 자체의 언어를 가진 일종의 잠재적 실체인 꿈에 대한 몰두, 성적 상징체계의 강조 같은 - 새로운 심리학(내면의 심리적 현실세계)에 큰 영향을 받았다.
2-3. 쟉퀴 부뤼니우스(Jacquis Brunius)의 프랑스의 전위영화에 대한 세가지 분류
① 최초의 일보는 루이 델뤽(Louis Delluc)이라는 단일 인물에서 비롯되었다. 델뤽은 시나리오 작가로서 활동하다가 얼마 후엔 자신이 직접 뛰어 들어 <열정>(Fievre, 1922), <떠돌이 여인>(La F'emme de Nalle Part, 1922), <범람>(L'Inondation, 1924) 이라는 세편의 극영화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4년에 죽기까지 전위영화 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던 것은 그의 비평작업에 의해서였다.
② 문학작품을 원본으로 하는 이야기체 영화들이면서 동시에 충격적인 촬영각도나 슈퍼임포지션(Superimposition), 연촛점(soft focus) 등 수많은 트릭기법을 효율적으로 사용한 작품들이 포함된다. 여기에는 뒬락의 <뵈데부인의 미소>(La Souriante Madame Beudet, 1922), 마르셀 레르비에(Marcel L'Herbier)의 <고 마띠아 빠스깔>(Feu Mathias Pascal, 1924)과 <인간야수> (L'Inhumaine, 1925), 쟝 엡스탕(Jean Epstein)의 작품들, 그리고 끌로드 오땅 라라(Claude Autant Lara), 쟝 르노와르(Jean Renoir), 아벨 강스(Abel Gance)와 같은 이들을 들 수 있다.
③ 파리학파(The School of Paris)
여기에는 상업영화와 전위운동을 교류시킨 작가들과 비상업적인 작품에 진력한 작가들이 병존하고 있다. 첫 번째 그룹엔 르네 끌레르(R'ene Clair), 카발칸티(Alberto Cavalcanti), 루이스 부뉴엘(Luis Bunuel) 등을 꼽을 수 있고 두 번째 그룹엔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 만 레이(Man Ray),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등으로 이들은 영화작가이기 이전에 먼저 화가들로서 자신들의 실험적인 연장선 위에서 영화에 대한 흥미를 느끼고 또 실재의 응용에도 몰두했던 인물들이다. 특히 부뉴엘과 달리(Salvador Dali)가 공동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부뉴엘이 연출한 <안달루시아의 개>(Un Chien Andalou, 1928)는 이 시대 최고의 전위영화로 손꼽히고 있다.
<안달루시아의 개>(1928년), 루이스 부뉴엘(Luis Bunuel)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덧붙여야 할 것은 부뤼니우스가 분류한 두 번째, 세 번째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디미트리 키르자노프(Dimitri Kirsanoff)의 <메닐몽땅>(Menilmontant, 1924)이라는 작품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카메라를 직접 손에 들고 촬영하는 방법(hand-held camera)을 통해 인상적인 몽타쥬와 서정적인 슈퍼임포지션을 창안해 냄으로써 주인공 소녀의 애뜻한 운명을 효과적으로 묘사했다.
경제 대공항이라는 냉혹한 현실이 영화작가들로 하여금 더욱 더 사회 정치적으로 연루되도록 강요하였고, 또한 유성영화의 도래로 인하여 무성영화가 폐물화되는 실정이므로 실험영화 작가들의 능력으로는 값비싼 유성영화를 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기에 대부분의 전위영화 작가들은 영화제작을 포기하던가 아니면 상업적인 기록영화나 극영화를 제작하든가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야만 했다. 또한 갈수록 너무나도 주관적이고 난해한 그들의 시도들은 엘리트 취향에 맞는 것이었기에 결국 관객들이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도 또 다른 하나의 큰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위영화는 대공항의 끝에서 16㎜필름의 보급과 미국에서의 관심과 맞물리면서 제2차 전위영화시대로 이어진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전위영화가 나중 알프레드 히치콕이나 마야 데렌의 작품, 헐리우드의 ‘몽타주 시퀀스’, 그리고 몇몇 미국 영화 장르와 양식들(공포영화, 필름 누와르)에 계속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 아방가르드는 전위라는 말로 번역되는데, 이러한 전위영화는 1930, 40년대 <실험영화 Experimental Film> 혹은 <시적영화 Pletic Cinema>로 알려졌고, 50년대에는 <독립영화 Independent Cinema>의 일부분으로, 특히 미국에서는 <지하영화 Underground Movie>라고 불리웠다. 그러다 60년대에는 미국에서 <새 미국영화 New American Cinema>의 일부로 생각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