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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예술산책

소비에트 몽타주 (Soviet Montage)

소비에트 몽타주

- 푸도프킨(V. I. Pudovkin)과 에이젠슈타인(S. M. Eisenstein)을 중심으로 -

 

"몽타주는 단순히 숏과 숏의 결합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 청각적, 극적 요소 등을 특정한 미학적 목적을 위해 결합하는 것을 말한다."
김용수, 『영화에서의 몽타주이론』(서울: 열화당, 1996), 13. 


<전함포템킨> (1925년), 에이젠슈타인(S. M. Eisenstein)


1. 역사적 배경


  1908년, 최초로 러시아 영화촬영소가 모스크바에서 작업을 시작하였으나 그 당시 상황은 극장도 별로 없었을 뿐만 아니라, 표도 비싸서 대중(노동계급)들은 영화관에 갈 능력이 되지 못하였고, 높은 문맹률은 인쇄된 자막을 부담스럽게 여기게 되어 러시아 영화는 대중적인 예술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리고 모든 필름의 공급과 장비 또한 프랑스와 독일에서 계속 수입하는 실정이었고 모든 영화들도 단지 유럽에서 제작한 것들을 평범하게 모방하는 수준이었다.

  1917년 러시아의 혁명과 더불어 시작된 소비에트 정부는 생활의 각 분야를 정비해야 하는 힘든 업무에 직면하였고,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영화제작과 배급체계 역시 새로운 정부의 목적에 봉사하는 실질적인 생산을 해낼 수 있게 되기까지에는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1918년 7월 국가교육위원회 영화분과는 생필름의 공급을 엄격히 통제하기 시작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많은 영화 제작자들과 배우들은 그들이 소유한 모든 장비와 필름들을 가지고 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1919년, 모든 산업은 국유화 되었고, 같은 해 새로운 소비에트 영화감독들을 양성하기 위해 모스크바 영화 전문학교(Moscow Institute of Cinematography)가 설립되었다. 그 후 1925년에는 국내외 배급체계 및 질서를 재정립하기 위해 소비에트 영화기업 합동(Sovkino Trust)이 형성되는데,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영화를 강력한 교육수단으로 본 레닌의 선견지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레닌(Lenin)은 1922년에 영화제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예술 중, 영화야 말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


2. 소비에트 몽타주 영화


  1919년경 형성되기 시작한 새로운 소련영화는 당시 우익과 좌익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처음에 우익은 전통 연극의 상류계급 인물을 인민위원이나 농민들, 적군 병사들로 대체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관습적인 방법과 형식을 사용하면서 오래된 연극적 전통 속에 안주하였기에 연애 이야기, 해학, 영웅시가 계속 등장하였다. 그러면서 우익의 작업은 보다 세련되어져 사회학적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하게 되는데, 그 예로 애브램 룸(Abram Room)의 <침대와 소파>(Bed and Sofa, 1927)를 들 수 있다.

  반면 좌익은 내용 뿐 아니라 형식의 혁신에 있어서도 훨씬 더 급진적이었다. 우리가 다루고자하는 소비에트 영화는 보통 두 명의 좌익 개척자들의 이론과 실험에서 나온 것들로 이 중 한 사람이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이다. 그 또한 혁명의 도구로서 교육적이고 선전적인 영화의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표현 형식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문맹의 노동자와 농민이 압도적 다수로 구성된 사회에서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역사적 투쟁과 혁명의 이상을 가르치기 위해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그는 1919년에 키노 아이 그룹(Kino Eye Group)을 창설하고 성명서를 발표하기 시작하는데, 특히 베르토프는 '부지불식간에 포착되는 실체'(Life caught unawares)를 중시하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어떤 것도 각색되거나 연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르도프는 단순히 현실세계를 기록하기 보다는 그것을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편집의 중요성 또한 강조하였다.

  또 한 사람의 개척자는 후에 모스크바 영화학교 교장이 된 레프 쿨레쇼프(Lev Kuleshov)이다. 미국식 몽타주(American Montage)[각주:1]에 크게 영향을 받은 쿨레쇼프는 '인위적 풍경', '쿨레쇼프 효과'[각주:2]와 같은 일련의 실험을 통해 '재료의 조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할 수 있다는, 다시 말해 편집을 통해 하나의 숏은 다른 숏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가 탄생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또한 쿨레쇼프는 급작스런 비약보다는 관객이 알 수 있게끔 부드러운 전환을 중심으로 하는 ‘벽돌쌓기의 원리’를 언급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영화가 대중에게 호소력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 그의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실험들은 푸도프킨과 에이젠슈타인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풍성해지게 된다. 하지만 1930년대 들어 스탈린(Stalin) 통치하에서 이 모든 실험들은 정지당했고,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라는 스탈린의 획일적 이론으로 대치되면서 소비에트 몽타주는 베르토프의 <열광>(1931)과 푸도프킨의 <도망자>(1933)와 같은 작품의 개봉을 마지막으로 1933년에 끝이 난다. 


영화사상 가장 빛나는 몽타주기법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전함포템킨>의 한장면


3. 푸도프킨(V. I. Pudovkin)과 에이젠슈타인(S. M. Eisenstein)


  쿨레쇼프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푸도프킨은 쿨레쇼프처럼 관객의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이야기를 누적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쌓은 ‘벽돌쌓기’이론을 옹호하였다.(연결 몽타주) 그러나 푸도프킨 이론의 독창성은 사실주의 몽타주, 즉 몽타주란 사건들을 잘 선택하고 연결해 현실을 보다 인상적으로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 있다. 여기서 푸도프킨의 몽타주는 맹목적인 모방을 벗어나 ‘완화된 사실주의’를 향하는 것이다.

  반면 에이젠슈타인은 급작스러운 전환 혹은 비약에 기초한 충돌 몽타주를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는 관객의 창조적인 이미지 연상을 전제로 한 것으로, 그들의 의식이나 정서를 새로운 차원으로 고취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김용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연결 몽타주가 삶의 순간들을 그럴듯하게 연결시켜 ‘현실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려고 하였다면, 충돌 몽타주는 인간의 삶을 단편적인 조각으로 재구성해 새로운 리얼리티를 창조하려고 하였다.” (김용수, 250)

  먼저 에이젠슈타인의 이론은 충돌의 원리에, 푸도프킨의 이론은 연결의 원리에 토대한다.
  에이젠슈타인은 숏과 숏 사이의 급작스러운 비약이 초래하는 충돌로 새로운 차원의 의미나 정서적 반응을 발생시키려고 하였다면, 푸도프킨은 그들 사이의 조리 있는 연결로 이야기를 선명하게 전개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는 비연속적 편집으로, 푸도프킨의 몽타주는 연속적 편집으로 각각 특징지을 수 있다. 즉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는 인과론적인 플롯을 탈피해 이미지 연상을 중시하는 탈선형적 이야기를 지향한다면, 푸도프킨의 몽타주는 이야기의 연속성과 인과율에 충실한 선형적인 이야기 방식을 택하였다.

  이러한 에이젠슈타인과 푸도프킨의 몽타주는 각각 다양성과 유기적 통일성의 미학을 내포하고 있다. 에이젠슈타인은 다채로운 예술적 요소들을 대위법적으로 결합해 다음(多音)의 효과를 발생시키려고 했다면, 푸도프킨은 모든 예술적 요소들을 서로 조화롭게 관계 맺어 통일된 의미나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했다.

  이와 같은 특성들은 에이젠슈타인과 푸도프킨이 각각 서사적 구성(epic construction)과 극적 구성(dramatic construction)의 전통을 이어 받았음을 시사해 준다. 즉 에이젠슈타인의 이론이 중세연극, 셰익스피어 시대의 연극, 브레히트 연극으로 이어지는 서사적 구성의 전통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면, 푸도프킨의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 신고전주의, 사실주의 연극으로 이어지는 극적 구성의 전통을 반영하는 것이다.

  에이젠슈타인과 푸도프킨은 이야기 구성방법에서 대조될 뿐만 아니라 예술적 표현의 본질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태도를 보인다. 에이젠슈타인이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호소력이 강한 양식화된 형식으로 삶을 적극적으로 재창조하려고 했다면, 푸도프킨은 현실을 인상적으로 반영하는 사실주의적인 형식을 추구했던 것이다. 즉 에이젠슈타인이 예술을 강렬한 정서적 표현으로 생각하는 낭만주의적 입장을 취했다면 푸도프킨은 예술의 본질을 모방으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이들의 다른 점은 영화연기에서도 나타난다. 푸도프킨은 배우는 우선 역을 심리적으로 경험하고, 그러한 내적 경험을 외적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한 연기는 논리적 연속성과 액션의 일관된 흐름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사실주의 미학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반면 에이젠슈타인이 생각하는 영화 연기는 우선 충돌의 원리에서 출발한다. 즉 영화 연기는 충돌 몽타주처럼 감정의 변화를 비약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소위 ‘단절 연기’라 불리는 에이젠슈타인의 연기 방법은 점진적인 변화를 지향하는 푸도프킨의 사실주의 연기와 대조된다. 그러나 에이젠슈타인의 연기론은 후기에 와서 총체적인 이미지를 중시하는 입장과 함께 약간의 변화를 겪는다. 다시 말해 배우들은 맡은 역의 특별한 이미지들을 선별하고 결합해 총체적인 이미지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에이젠슈타인은 쿨레쇼프처럼 영화배우는 특색 있는 외모를 갖춘 ‘전형’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렇듯 신체적이고도 외적인 표현력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에이젠슈타인이나 쿨레쇼프는 마이어홀드의 연기방법론을 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심리적 경험과 역의 논리적 연속성을 강조하는 푸도프킨은 스타니슬라프스키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차이를 언급해 보면 아래의 도표와 같다. 

                            에이젠슈타인                                 푸도프킨 
                                  충돌                                    연결
                            비연속적 편집                               연속적 편집 
                         비선형적인 이야기                            선형적인 이야기
                            다양성의 미학                            유기적인 통일성 
                             서사적 구성                                 극적 구성
                                표현론                                   모방론
 

  1. 미국식 몽타주는 특히 그리피스(D.W.Griffith)의 영화 스타일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빠른 편집, 빈도 높은 클로즈업, 그리고 교차편집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본문으로]
  2. 몽타주는 배우의 연기, 특히 그의 심리적 혹은 정서적 상태마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으로 똑같은 배우의 표정 앞에 스프접시를 놓아두었을 때(배고픈 표정으로), 곰 인형을 갖고 노는아이의 숏을 놓아두었을 때(흐뭇해하는 표정으로), 관에 누워 있는 여인의 숏을 놓아두었을 때(슬퍼하는 것으로) 관객들의 반응이 달랐다는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