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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넓히기

개화기 및 일제강점기와 YMCA운동

개화기 및 일제강점기와 YMCA운동 
1. 序


  한국YMCA는 그 역사적 흐름에 있어서 대체로 세 가지 성격의 운동유산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기독교청년회’에서 설명되는 청년운동의 유산이며, 둘째는 YMCA의 파리선언문에 연유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범주속에서 이해되는 선교운동의 유산이고, 셋째는 일제하의 피식민지적 상황속에서 경험한 민족주의운동의 유산이다. 위의 세 가지 운동 유산 중, 처음의 두 가지는 세계YMCA의 운동사속에 살아있는 공동의 유산인 반면, 세 번째 민족주의운동의 유산은 한국YMCA가 다른 나라의 YMCA와 비교해서 유달리 강하게 경험한 한국 특유의 운동유산이다.
  이제부터 살펴보게 될 한국YMCA운동사는 세 번째 언급한 한국 특유의 운동유산을 중심으로 한국시민사회 속에서 한국YMCA운동이 시대별로 어떠한 모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는지를 고찰하게 될 것이다.

2. 개화기 및 일제강점기의 YMCA운동 


  1899년, 독립협회 해산 이후 독립협회에 참가했던 청년들 150여명을 중심으로 YMCA 창립운동이 벌어져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現 서울YMCA)가 창립된다.
  1904년에는 독립협회 관계로 투옥되었던 이상재를 위시한 일군의 개화파 무리들이 석방되면서 YMCA에 적극 가담하게 되는데 이들은 독립협회에 앞장섰던 사람들인 만큼 독립협회운동에서 실패했던 구국독립운동을 YMCA운동을 통해 전개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초창기 한국YMCA는 독립협회의 후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전덕기, 이준, 이승훈, 김구 등을 위시한 기독교 민중세력인 상동파가 합류하면서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는데, 1907년 6월에 일어난 헤이그 밀사파견의 주동인물들 또한 YMCA 간부들이었다. 당시 서울과 일본의 내외신문들은 YMCA가 종교의 탈을 쓴 정치선동단체라고 비난을 퍼부었고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였던 서양 선교사들과 상당한 긴장관계를 초래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YMCA의 항일운동은 1907년경부터 한말 매국단체인 일진회와 대결하면서 본격화되었고, 일제의 한국침략계획이 노골화된 1909년에 이르러서는 그 활동이 더욱 맹렬해진다. 

  여기서는 일제강점기와 관련한 한국YMCA운동을 무단통치기, 문화통치기, 그리고 민족말살 및 병참기지화의 시기로 나누어 정리해 보고자 한다. 

  2-1 무단통치기(1910~1919) 

  이 시기에는 일제의 총·칼의 위협에 의해 한국인들의 항일의식과 민족운동가들의 활동이 근원적으로 봉쇄·억압되었다. 이 당시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한국의 토지를 강탈하는가 하면, 언론기관을 폐쇄하고, 사회단체를 해산하며, 사립교육기관을 최대한 억압하였다. 특히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신민회를 없애기 위해 일제는 105인 사건을 조작하게 되는데, 이 사건은 신민회의 중심을 이루었던 YMCA 세력을 뿌리 뽑기 위한 목적이기도 하였다.
  결국 일제는 한국YMCA의 독립성을 빼앗고, 1913년 일본YMCA하에 한국YMCA를 예속시키게 되지만 1919년의 2·8 독립선언은 동경YMCA의 핵심 멤버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3·1운동 때에는 - 민족대표 33인 중 9명이 YMCA 출신이었으며 - 학생Y가 조직과 동원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2-2. 문화통치기(1919~1931)

  이 시기, 일본은 3·1운동으로 폭발된 한국인들의 항일의식을 ‘문화통치’라는 허울 밑에서 무마하여 보다 차원 높은 식민정책을 수행하려고 하였던 것과는 달리, 많은 뜻있는 조선 젊은이들은 3·1운동의 한계로 말미암아 상해 임시정부와 같은 정부 조직이나 만주와 시베리아에서의 무장 독립군에 들어가 직접적인 투쟁을 통해 활약하게 된다. 

  반면 국내에서는 무실역행(務實力行)에 입각한 교육·경제·문화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한국YMCA는 지방조직을 확대하면서 문화운동과 농촌운동에 괄목할만한 업적을 이룩하게 된다. 그래서 육당 최남선은 한국YMCA의 교양강연회, 토론회, 환등회, 음악회, 직업교육과 사회교육, 체육, 농촌사업을 중심으로 한 일곱 가지 활동을 역사적 공헌으로 언급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한국YMCA는 1913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빼앗겼던 자주성을 1922년에 다시 되찾아 세계기독교청년회 연맹에 직접 가입하게 되면서 국제적인 관계속에서 반봉건·문화운동을 지속하게 된다. 그러나 이 당시 한국YMCA운동이 의병항쟁이나 무력투쟁, 소작쟁의, 노동쟁의 등과 같은 적극적인 항일운동으로는 나아가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1927년경에는 YMCA운동이 미온적이며, 비혁명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김용복은 YMCA운동 자체가 기독교운동이었던 것과 연관시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양의 자유민주주의 토양에서 형성된 개신교는 그 자체가 정치적, 이념적인 경향성을 가지고 있어 자유∙평등∙정의 등의 가치에는 적극적으로 호응할 수 있었으나, 사회주의 이념에 대해서는 미온적 또는 부정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3∙1운동 이후 진보사상이 점점 민족해방운동에서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YMCA운동과는 일정정도 거리를 두게 된 것이다. 김용복, 『한국민중과 기독교』, (서울: 형성사, 1984), 229.

  하지만 초기 한국YMCA의 대표적 활동가이자 사상가였던 이상재가 의병에 의한 무장투쟁과 실력양성운동이었던 자강운동(自强運動)에 소극적 자세를 취한 것에서 YMCA운동의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사회진화론적 관점에서 실력배양을 통해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과는 달리, 이상재는 기독교정신에 입각하여 사회진화론적인 힘의 문명을 비판하면서, 전인교육을 통해 인간화를 실현시키고 인간의 도덕적·정신적·사회적 능력을 향상시킬 때, 자연스럽게 그 에너지는 외연(外延)되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 한국이 되살아 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외형적인 힘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는 발상 자체는 - 하느님이 부여하신 도덕을 파괴함으로써 - 결국 파멸로 갈 수밖에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상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덕은 기초이며 근저이요, 물질은 동량창벽과 지엽화실 집각이 어찌 질주하며 독장이 어찌 유성하리오. … 만일 도덕문명이 쇠약을 자취하였다 하여 물질적 과학에만 치중하여 전속력으로 급진하고 도덕을 경시한즉 무근저한 초목과 무기초한 가옥과 여히 필경 전복부패의 화가 입지하리니 잠시적 강포를 자시하고 화독을 세계에 보피하다가 기망할 모모국과 장망할 하하족으로 은감을 작하면 우리 민족의 무궁한 행복과 영원한 문명이 비에 재하다 하노니, 도덕은 종교에 불외하도다. 이상재, “문명의 해석”,『월남이상재연구』, 월남이상재선생동상건립위원회 편, (서울: 로출판, 1986), 255.

  그렇기에 초창기 한국YMCA운동은 무실역행(務實力行)에 입각한 애국계몽운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전택부는 그의 글, “한국YMCA운동 80년의 회고(1)”에서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① 순국의열파, ② 무력항쟁파, ③ 애국계몽파로 분류하면서 한국YMCA의 독립운동을 애국계몽파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순국의열파는 나라가 망했으니 차라리 죽자하여 자결하는 사람들과 의병들이 대표하며, 무력항쟁파는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군을 편성하여 무력으로 항쟁하든지 아니면 국제외교를 통하여 독립을 호소하는 사람들이다. 이에 비하여 세 번째 애국계몽파는 어디까지나 국내에서 민중과 더불어 고난을 겪으면서 민중계몽과 실력배양을 통하여 독립을 이룩해 보자는 사람들이다. 한국Y는 여기에 속한다.  전택부, “한국YMCA운동 80년의 회고(1)”, 『한국YMCA의 이념추구 Ⅸ-한국YMCA 80년의 회고와 전망』, (제9회 한국YMCA 목적과 사업연구회 보고서, 1983. 8), 1-2. 


초기 덴마크식 체조강십 & YMCA야구단 

 2-3. 민족말살 및 병참기지화의 시기(1931~1945) 

  이 시기는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기의 소위 전시체제를 강요하던 시기로서 일제는 국사교육의 금지, 한글 사용금지, 창씨개명, 신사참배 등을 중심으로 하는 한민족말살정책을 시행하였으며,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하려 하였다. 특히 일제는 1938년에 그들의 식민지 정책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되는 한국의 언론·집회 및 단체활동을 조직적으로 파괴하기 시작하였고, 한국YMCA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결국 한국YMCA가 적극적으로 주도하였던 농촌운동이 일제의 방해공작에 부딪치게 되고 YMCA와 관련이 깊은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회원들이 체포되었다. 나아가 ‘조선기독교연합회’를 조직하여 한국교회의 자주성을 빼앗은 일제는 마침내 한국YMCA를 다시 일본기독교청년회 동맹에 강제로 가맹시키게 된다.
  이때부터 서울YMCA는 ‘일본Y(경성) 종로지회’로 격하되어 형식적으로만 존속하게 되었고, 그 외 전국의 모든 YMCA는 완전히 폐쇄되고 말았다.

3. 結


  이러한 초기 한국YMCA 운동사에 대하여 김경재는 “한국YMCA운동사에 있어 해방이전까지의 역사란 민족독립 해방을 위한 정치적, 사회적 운동집합체였으며, 민족경제의 파탄과 민중의 수탈상황에서 한국YMCA는 민족경제의 건립운동체요, 각종 산업 경제활동의 구체적 운동 조직체였다”고 말한다.
  또한 김용복은 이러한 한국YMCA의 운동에 대하여 “한국기독교 민족운동의 핵심체로서 단순한 종교적 신앙단체도 아니요, 단순한 사회문화단체도 아니고 신앙을 역사화하여 역사변혁의 동력으로 삼는 운동체”라고 평가한다.

  강순규, 『한국시민사회 형성과정에서의 YMCA운동 고찰- 시민사회론을 중심으로』, (2003년 한국YMCA 간사논문) 중 일부 수정 보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