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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후 군사독재정권 및 근대화와 YMCA운동

해방이후 군사독재정권 및 근대화와 YMCA운동


1. 序

  

  한국의 근대화과정은 그 시발점에서부터 외세의 강압에 의한 타율적 개국으로 인해 문화적인 적합성의 위기(relevancy crisis)를 초래하였고, 곧이어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게 됨에 따라 민족정체성의 위기(identity crisis)까지 중첩되었다.
  나아가 해방과 더불어 분단 및 전쟁과 냉전의 심화로 인해 근대화 과정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요인에 의해 왜곡됨으로써 국가 통합성의 위기(integrity crisis)까지 심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특히 분단이라는 한국적 특수상황은 사회부문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억압을 조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경제·정치·군사적으로 대외의존성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 시기를 조금 더 부연해 보자면, 성립 초기부터 역사적 정당성과 자기기반이 취약했던 이승만 정권은 정치적 위기를 맞을 때마다 미국의 도움을 배경으로 반공주의를 내세워 국회프락치사건(1949), 국제공산당사건(1952), 인도 뉴델리 밀회사건(1954) 등을 터뜨려 고비를 넘기면서 권력을 유지했지만 결국 4·19혁명이라는 민중의 전면적인 저항에 부딪혀 집권 12년만에 무너지게 된다. 이어 등장한 장면 정권은 5·16군사 쿠데타로 말미암아 8개월만에 무너지고,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군부독재정권은 3선 개헌과 유신체제로의 전환을 통해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장기 집권을 이룩해 낸다. 특히 5·16군사 쿠데타 이후 시작된 본격적인 근대화는 시민사회적 배경과는 무관하게 국가의 주도와 외국의 지원에 의해 추진됨으로써 민주화와는 무관한 ‘자본주의 산업화’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해방 이전과 이후를 나누어 살펴볼 때, 통치권자가 일제에서 군부로 바뀌었을 뿐, 시민사회에 대한 국가의 강압적인 통치와 이에 반발하는 시민사회의 도전과 저항은 다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상황의 전제하에 해방 이후 군사독재정권과 근대화과정속에서 한국YMCA운동이 어떻게 자리매김하여 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2. 해방 후 군사독재정권 및 근대화와 YMCA운동 


  2-1. 1950년대의 한국YMCA운동
  해방 이후, 한국YMCA는 미국의 원조아래 미국YMCA의 철학과 사업양식에 결정적 영향을 받으면서 초창기의 운동정신이 퇴색된다. 특히 한국적 상황을 무시한 채 미국의 프로그램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 문제였으며, YMCA안에 핵심적인 지도력이 없다는 것도 큰 문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 피난 시기였던 1952년, 간사의 질적 향상과 전문성 확립을 위하여 'YMCA 전문학원'을 창설함으로써 50~60년대의 한국YMCA를 짊어지고 나갈 중추적 지도력을 길러냈다는 것과 학생YMCA 전국연맹(1952년) 및 하이-Y 전국연맹(1953년)이 결성되었다는 것은 1950년대의 의의로 꼽을 수 있다.

  2-2. 1960년대의 한국YMCA운동
  4·19 혁명과 함께 시작된 1960년대는 북미YMCA 연합회 국제위원회의 기금을 중심으로 대구(1959), 서울(1962), 부산(1964)의 YMCA들이 새 건물을 갖게 되면서 재건과 사업확장기로 이행하게 된다. 특히 학생YMCA운동과 하이-Y운동이 한국YMCA의 주된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면서, 이들에 의해 개발되고 추진된 향토건설사업이 제19회 전국대회에서 ‘YMCA 3개년 전진운동’으로 수렴되어 상당한 성과를 얻게 되고, 나아가 70년대 초에 전개된 ‘YMCA 사회개발운동’의 초석이 된다.
  하지만 군사독재정권 아래 모든 순수 민간단체들의 활동은 제한되었고, 그나마 존속된 각종 운동지향적 프로그램들 또한 극도로 무력화되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심한 인플레를 수반한 경제성장주의 속에서 기구로서의 YMCA는 생존을 위해 중산층의 소비문화에 영합하는 ‘수익성 프로그램’에 치중하게 된다. 


대학생들의 농촌봉사활동

  2-3. 1970년대의 한국YMCA운동 


양곡은행 개설식(1974) & 리어카 전달광경(1972)

  유신체제와 함께 시작된 1970년대 한국사회는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 과정을 거치면서 공동체의 붕괴, 사회적 아노미현상, 문화적 주체성의 위기, 사회전반에 걸친 양극화 현상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참다운 시민의식의 발전과 시민문화의 형성은 소외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아래 한국YMCA는 간사회(AOS / Association Of Secretaries of YMCA's of Korea)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형태의 자구적 노력을 통해 운동성과 주체성에 대한 새로운 전환점을 모색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1971년 대구에서 열린 제20차 전국대회이다. 

  여기서 한국YMCA는 ‘사회개발’의 문제를 중심주제로 다루면서 ‘사회개발위원회’를 발족시켜 시민의식개발, 지역사회조직, 사회교육 등을 중심으로 한 사회개발사업을 전국적으로 진행시키게 된다. 특히 시민의식개발의 측면에서 시작된 것이 바로 ‘시민논단’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민논단은 군사독재정권의 압력에 밀려 ‘교양강좌’로 귀착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YMCA 사회개발사업은 점차 그 영역을 확장해 감에 따라 농촌사업으로도 그 영역을 넓히게 되는데 이러한 70년대 사회개발사업과 관련하여 김천배는 다음과 같이 평한다. 

  한국YMCA의 ‘사회개발운동’은 3년간에 걸친 거시적인 계획과 실천을 통하여 ‘기독교사회참여’를 YMCA운동으로 체질화하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으며, 나아가서는 이 운동의 전 기간을 통하여 경험한 성취와 좌절은 제5차 세계대회(노팅험 1969) 이래 전 세계의 YMCA를 휩쓴 ‘주체성 위기’(Identity Crisis)의 한국적 컨텍스트를 형성하는데 기여하여 마침내 70년대 중반의 한국YMCA의 ‘전환’을 가능케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YMCA연맹 엮음, 『한국YMCA운동사』,(서울: 로출판, 1986), 287. 

  더불어 1974년, 한국YMCA는 대한YMCA연맹 창립 60주년을 맞아 ‘목적과 사업연구위원회’를 신설한다. 한국YMCA는 이 연구회를 통해 한국YMCA운동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종합적인 파악과 새 시대에 대응할 수 있는 운동의 활성화를 검토하게 되는데, 그 당시 목적과 사업연구위원회의 연구활동으로는 첫째, YMCA를 근본적으로 선교운동론의 입장에서 재정립하는 작업이었고, 둘째, YMCA를 청년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청년운동체로 보아 이를 분석함으로써 그 역사적 변천과 더불어 변해온 시대적 사명을 포착하는 작업이었다.

  먼저 한국YMCA 목적과 사업연구위원회에서는 이념추구 작업에 우선 순위를 두면서 한국YMCA 목적문을 작성하게 되고, 1976년 대한YMCA연맹 제23차 전국대회에서 채택함으로써 한국YMCA의 이념적 지표로 천명하게 된다.

  기독교 청년회는 젊은이들이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함께 배우고, 훈련하며 역사적 책임의식을 계발하고, 사랑과 정의의 실현을 위하여 일하며 민중의 복지 향상과 새 문화 창조에 이바지하므로써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한국YMCA 목적문은 결국 초기 한국YMCA 운동적 특성의 맥을 그대로 잇는 것으로, 해방 이후 단순히 미국YMCA식의 경영과 프로그램으로 인하여 방향 감각을 잃고 있던 한국YMCA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한국적 상황과 역사적 조명위에서 정립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3. 結 


  하지만 이 시기는 군사독재정권에 의한 일명 ‘긴급조치시대’였다. 따라서 당시 자발적 결사로서의 시민사회단체란 결국 세 가지 유형으로 존재하였는데, 그 첫째가 권위주의 국가의 지원을 받는 관변단체, 둘째가 전투적이고 저항적인 사회운동단체,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중간지대로서의 탈정치화된 혹은 비정치화된 시민사회단체들이었다.

  그렇기에 권위적인 군사정권의 억압과 통제로 인하여 관변단체나 탈정치화된 시민사회단체들만 합법적인 영역에 존재할 수 있었던 반면, 저항적인 시민사회단체들은 비밀결사로서의 비합법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혹자는 이 시절을 평가하면서 권위주의 독재하에서 합법적인 영역에 속해 있다는 것 자체가 국가나 정치사회에 포섭되어 있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분류에 따르자면 한국YMCA는 결국 세 번째 유형에 가까운 합법적인 단체로서 존재하였다. 그렇다고 한국YMCA를 그 당시 국가나 정치사회에 포섭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황주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일 초기 단계의 운동을 문화운동, 그보다 한단계 발전한 것이 경제운동, 그 다음이 정치운동이라 할 수 있다. 문화운동은 뿌리요 경제운동은 줄기며 정치운동은 꽃이다. 이 모든 힘을 합해 획득한 권력은 운동의 열매다. 꽃이 피었다고 줄기나 뿌리가 필요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뿌리가 내려야 줄기가 뻗고 그 위에 꽃이 피어나 열매를 맺을 수 있으니, 그런 의미에서 운동은 각 영역에서 자기 역할이 있고 단계로서 연관을 맺으면서 발전한다고 하는 것이다. YMCA는 문화영역에서 대중의 가치변혁을 위한 조직사업을 하는 것을 자기의 일차적 임무로 하고 그것에 충실하고자 노력해왔다. … 그 주된 형태는 물론 주로 클럽이라고 불리는 소집단운동이다. … YMCA는 문화운동을 하는 합법 공개기구 운동체로서 금욕적일 만큼 다른 영역 운동과의 분리를 분명히 한다. … 바른 결합은 바른 분리의 다른 표현으로, 바르게 결합하기 위해서는 바르게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 폐쇄상황하에서 바른 분리와 결합의 지혜는 ‘형식적 분리와 내용적 결합’이다. … 이기는 싸움을 해야 한다. 이기려면 사회가 분화되고 전문화된 만큼 사회운동도 분화되고 전문화되어 사회문제의 각 전선을 맡아 총체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황주석, “YMCA를 통한 소공동체운동의 교훈”, 『한국사회운동의 혁신을 위하여』, 나라정책연구회 편저, (서울: 백산서당, 1993), 75, 80-86. 

  그렇기에 군사독재시절, 사회운동은 사회운동대로 자기의 고유한 목적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YMCA는 YMCA대로 - 시민논단과 농촌운동을 중심으로 - 대중의 가치변혁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 모든 일련의 활동들은 결국 우리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시일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상당히 오랜 기간의 노력이 있어야 하며, 다양한 방식의 노력들이 경주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한국YMCA는 해방 후, 지도력의 부재와 함께 혼돈기에 빠져들지만 1970년대 접어들면서 YMCA의 자기정체성 모색과 함께 대중의 가치변혁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강순규, 『한국시민사회 형성과정에서의 YMCA운동 고찰- 시민사회론을 중심으로』, (2003년 한국YMCA 간사논문) 중 일부 수정 보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