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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으로부터, 왜곡된 세계사 구하기

유럽으로부터, 왜곡된 세계사 구하기


  1.
  학창시절 세계사를 배울 때, 역사는 ‘동방’에서 4대 문명으로부터 시작되어 그리스와 로마를 통해 유럽으로 전해진 후,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그리고 산업혁명을 거쳐 지금의 “진보”에 이르렀다고 배워왔다.
  중세시절 짧게 언급되는 이슬람은 본질적으로 서구(유럽)에 속하는 과학을 일시적으로 보전하였다가 다시 유럽에 건네주고는 역사의 뒤안길로 소리 없이 사라진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주시하면, 7세기 정통 칼리프 시대를 시작으로 11세기부터 지속적으로 팽창한 이슬람사회는 - 13세기 몽골 패권기 이후 - 16세기에 이르러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를 중심으로 북아프리카까지 뻗어 있던 오스만제국 외에도, 페르시아 지역의 사파비제국, 북인도의 무굴제국으로 나뉘어 적어도 18세기까지 근 1,000년간 번영을 구가하였다. 

  그렇기에 우리가 아무런 의심 없이 학교에서 배워 온 세계사 이면에는 역사에 ‘주류’가 존재하며, 그 주류는 바로 ‘서구’라는 암묵적인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서구가 아닌 다른 모든 문명들은 ‘동방’, ‘동양’이라는 이름 아래 다 같이 뭉뚱그려지고, 세계는 ‘서구’(western)와 ‘동양’(oriental), 즉 유럽과 비유럽으로 이분화 된다. 이러한 논리로 이미 세계의 ‘절반’을 차지한 유럽은 언제나 진리와 자유를 갈망하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순수한 도덕성을 추구하는 존재로 미화되어지는 반면, 비유럽은 언제나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게 이와는 반대의 형태로 격하되었다.[각주:1] 이러한 관점은 오리엔탈리스트라고 불리워지는 서구의 학자들에 의해 더욱 견고해졌고, 근대 이후 서구에 의한 식민화는 결국 역사의 식민화로 전이되어 오늘날에도 우리의 역사 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2.
  우리가 이러한 도그마에서 벗어나 역사를 직시한다면 보편적인 세계사란 존재할 수 없고 오직 각 세계들의 자기중심적인 역사들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 이러한 성향은 중국인들의 ‘중국’(Middle Kingdom)이라는 이미지나 이슬람의 중간기후대 이미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각주:2]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3,000년 이상 지속적으로 문화적 발전을 보여 왔던 지역을 꼽아보면 그리스·로마문화를 중심으로 한 유럽 외에도 이집트를 포함한 중동, 인도, 중국이라는 3개의 지역이 더 존재하였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 4개의 문명권도 사실 그 경계선은 그리 명확하지 않다.[각주:3] 
  그래서 마셜 호지슨(Marshall G. S. Hodgson)은 그의 책 『마셜 호지슨의 세계사론』에서 문화와 역사에서의 공통된 배경(civilized tradition)을 전제로 세계를 구분하면 극동, 인도, 중동, 유럽으로 나눌 수 있지만 이를 다시 크게 나누면 ‘인도-중동-유럽’과 극동으로 이분화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분화의 근거로 호지슨은 지리적으로 히말라야 산맥이 중국과의 경계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3.
  안드레 군더 프랑크(A. G. Frank)는 그의 책 『리오리엔트』를 통해서 “1,800년 이전의 유럽은 세계경제에서 다른 지역에 비해 더 중요하지도 앞서 있지도 않았다. 만약 1,800년 이전에 세계경제에서 우세한 지위를 점한 지역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시아였다. 당시 세계경제에서 '중심적' 지위와 역할이 있었고 '여러 중심' 중에도 서열이 있었다면 그 정점에는 중국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사실 유럽은 중세가 시작된 후에도 한참동안 문화적으로 아프로-유라시아(Afro-Eurasia)의 변방에 위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예술 등 다방면에서 중국, 인도, 중동, 그리고 동지중해로부터 일방적으로 수혈을 받는 종속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다.

  한 예로 15세기의 조선술을 살펴보자. 1492년 -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 콜럼버스(C. Columbus)가 승선하였던 산타마리아(Santa Maria)호의 경우, 배의 길이는 23m, 폭은 7.5m, 무게는 80톤 정도였다고 한다. 반면 콜럼버스보다 반세기 이전인 1405년~1433년 사이, 중국 명나라 환관이었던 정화(鄭和, Zheng He)는 영락제(永樂帝)의 명에 따라 대함대를 이끌고 7차례 출항을 하여 멀리는 아프리카의 케냐 해안까지 도달하였다고 하는데, 그때 정화가 승선하였던 보선(寶船)의 경우, 길이가 120m에 폭이 50m, 무게는 약 3천 톤에 달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유럽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크기의 배였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바로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당시 중국과 유럽의 격차였다.[각주:4](아래 그림 참조)

  그래서 18세기, 『국부론』을 쓴 영국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중국과 이집트, 인도는 세계의 어떤 나라들보다 부유하다고 언급하면서 그 중에서도 특히 중국은 유럽의 어느 곳보다도 훨씬 부유한 나라임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4.
  하지만 15세기 말, 아시아와 아메리카로 가는 새로운 항로의 개척은 유럽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게 된다. 특히 아메리카로부터 착취한 막대한 은의 유입은 아시아와의 무역을 가능하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침체된 유럽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음으로써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이는 산업혁명과 제국주의의 발전으로 이어져 결국 19세기 들어서면서 유럽이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된다.

  그 결과 이전까지 유럽인들이 지니고 있던 아시아에 대한 존경심과 동경은 사라지고 의도적인 폄하와 경멸적인 고정관념이 자리 잡게 된다. 이때부터 서구 역사학은 유럽이 이룩한 성과를 설명하고 비유럽 지역에서 그것이 왜 불가능했는지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고, 이를 위해 종교, 인종주의, 환경, 문화 등 여러 가지 설명 방식들이 동원되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칼 마르크스(K. Marx)와 막스 베버(Max Weber)를 예로 들어보자.

  먼저 칼 마르크스의 경우, 그는 인류의 역사 발전 단계를 생산양식에 따라 원시공동체 사회, 고대노예제 사회, 중세봉건제 사회, 근대 자본주의 사회,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로 구분하면서 한 생산양식에서 다른 생산양식으로 넘어가는 것은 그 생산양식 내부의 모순에 의해서라고 주장하였다. 그렇기에 자본주의 사회는 유럽에서 나타난 봉건 사회의 내적 모순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아시아는 고대노예제 생산양식의 변종인 ‘아시아적 생산양식’에서 정체되어 있었기에 아직 봉건적 생산양식을 경험하지 못한 아시아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간주되었다.
  한편 막스 베버는 왜 유럽에서만 유독 진보와 근대화가 가능했는지를 종교, 봉건제, 도시, 관료제, 법제도, 국가형태, 자본주의 등 온갖 주제를 통해 증명하려 했다. 이때 베버가 중요하게 생각한 개념이 “합리성”이었는데, 베버는 유럽의 “합리성”과 비유럽의 “비합리성”을 대비시켜 비유럽 세계의 후진성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특히 베버는 자본주의 탄생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연결 지었다. 열심히 일하면서 낭비하지 않고 돈을 모으려는 프로테스탄트들의 합리적인 태도에 의해 자본 축적이 가능했고, 축적된 자본을 다시 건전하고 윤리적인 사업에 투자함으로써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구인의 후안무치한 태도는 오늘날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5.
  우리는 2009년 미주기구(OAS) 정상회담에서 차베스가 오바마에게 선물해서 화제가 되었던 에두아르도 갈레아노(Eduardo Galeano)의 명저, <수탈된 대지>에서 저자의 목소리를 기억해야 한다. 갈레아노는 그의 책에서 1492년, “신세계의 발견”과 함께 수탈의 역사는 시작되었고, 상거래에 있어 주요 결제수단이었던 금과 은은 서구자본주의를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천국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였다고 언급하면서 서구의 풍요와 발전은 결국 라틴아메리카로부터의 수탈의 결과였다고 말한다. 더불어 안드레 군더 프랑크는 앞에서 언급된 그의 책 『리오리엔트』에서 “유럽이 아메리카에서의 착취를 통해 얻은 은으로 아시아 경제라고 하는 열차의 3등 칸에 달랑 표 한 장을 끊어 올라탔다가 얼마 뒤 객차를 통째로 빌리더니 19세기에 들어서는 아시아인을 열차에서 몰아내고 주인 행세를 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한다.

  분명 유럽은 그들의 후진성을 아메리카에 대한 착취와 그들보다 우월했던 동양의 문화를 수용하여 극복함으로써 18세기 이후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처음 일어났다고 해서 유럽의 역사를 영국사로 환원시킬 수 없듯이 근대에 들어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고 해서 세계사를 유럽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장으로 과장하고 은폐하고 왜곡해서는 안된다.

  유럽중심주의에 빠져있는 역사관과 세계사는 분명 새롭게 재해석 되어져야 한다. 이를 통해 '비유럽'은 잃어버린 세계사에서의 지위를 복원시켜야 하며 유럽사는 "원래"의 지위로 되돌려져야 한다. 

<참고서적>
1. 마셜 호지슨, 『마셜 호지슨의 세계사론』, (이은정 譯, 사계절출판사, 2006)
2. E. 갈레아노, 『수탈된 대지』, (박광순 譯, 범우사, 1999)
3. 안드레 군더 프랑크, 『리오리엔트』, (이희재 譯, 이산, 2003)
4. 마틴 버낼, 『블랙 아테나1』, (오흥식 譯, 소나무, 2006)
5, 존 M. 홉슨, 『서구 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 (정경옥 譯, 에코리브르, 2005)
6. Edward W. Said, 『오리엔탈리즘』, (박홍규譯, 교보문고, 1994)

  1. 먼저 그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그리스 문명에서 찾는다. 그리스는 인간중심적이고 합리적인 문명으로 근대 서구문명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다고 여겼다. 반면 오리엔트 문명은 - 역사적 사실과 관계없이 - 전제적이고 노예적인 문명으로 묘사되어진다. 한편 그리스를 잇는 헬레니즘적 문명은 그 의미와 비중이 축소되었다. 왜냐하면 알렉산더에 의해 오리엔트 문명과 결합된 그리스 문명은 고전 그리스 문명의 퇴화단계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를 잇는 로마(특히 서로마)였다. 로마는 대제국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권을 확립함으로써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하는데 기여를 했고 로마의 공화정은 근대 유럽의 민주정치 발전에 일익을 감당했다고 보았다. 반면 또 다른 로마인 비잔틴제국(동로마)이나 이슬람 문명권은 당시 유럽보다 훨씬 높은 문화수준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왜곡되고 축소되어졌다.어디 그뿐인가? 15세기 말 이래 유럽인들에 의해 정복된 아메리카는 유럽인에 의해서만 비로소 세계사 속에 편입될 수 있었고, 아프리카 또한 문명이 없는 ‘검은 대륙’으로 규정되어졌다. 이들의 눈에는 아시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본문으로]
  2. 이슬람권에서는 극단적인 열대에서 극단적인 한대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7개의 기후대로 나누었다. 너무 더운 남쪽에서는 사람들이 게을러져서 문명적으로 낙후되고, 또 너무 추운 북쪽지방에서는 사람들의 피부가 창백해지고 추워서 생각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오직 지중해지역과 이란 같은 중앙부의 온대 지방(네 번째 기후대)에서만 정신이 가장 활발해지고 문명이 가장 높은 수준으로 진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본문으로]
  3. 마틴 버널(Martin Bernal)은 『블랙 아테나』에서 그리스가 기원전 3,000년 이후 한때는 이집트의 식민지가 되기도 하는 등 여러 차례 침략을 받으면서 언어와 제도 등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페니키아인들로부터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한 예로 그리스 어휘의 1/3정도가 페니키아계, 1/5~1/4 정도가 이집트에서 온 것이며, 그리스 신의 이름 또한 대부분이 이집트에서 온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본문으로]
  4. 1492년 산타마리아호의 크기는 그보다 500년 전인 고려 태조 왕건(877~943년) 시대에 만들어진 배의 규모와 거의 유사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