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활세계스케치

좋은 전쟁, 나쁜 평화는 없다.

좋은 전쟁, 나쁜 평화는 없다.

  1.

  1987년 6월 항쟁 이후, 13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노태우 대통령(1988~1993)은 1988년 '7.7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통해 북한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민족의 공동번영을 모색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를 계기로 이듬해인 1989년부터 남북경제교류가 시작되었고 1991년 9월에는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게 된다. 이어 12월에는 '남북기본합의서' 채택과 함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발표된다.(1992년 2월 정식 발효)

  당시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된 결정적 계기는 한미 팀스피릿 훈련의 중단이었다. 노태우 정부는 1992년 1월 7일 팀스피릿 중지를 공식 발효했고, 같은 날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IAEA)에 가입해 핵사찰을 받겠다고 천명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1989년에서 1991년 사이에 급속하게 진행된 동유럽 및 소련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 말기인 1992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측 협상 대표 대변인이었던 이동복 전 안기부장 특보가 대통령의 훈령을 자의적으로 묵살한 '훈령 조작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해 이산가족 상봉이 무산된다. 이를 계기로 형성된 남북 간의 경색 국면은 한국 군부의 요청에 의해 1993년 3월 팀스피릿 훈련이 재개되면서 더욱 악화된다. 팀스피릿 훈련 재기에 분노한 북한은 즉시 핵확산금지조약(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 NPT) 탈퇴로 맞대응하면서 우리가 익히 들은바 있는 1994년 '서울 불바다' 위기론이 등장하게 된다. ‘제2의 한반도 전쟁’ 직전까지 내몰렸던 당시의 급박한 상황은 카터(Jimmy Carter) 전 대통령의 방북을 계기로 1994년 10월, 북미 간 북핵 폐기 대 경수로 제공(100만kw 급 2기)과 북미 관계 정상화를 골자로 하는 ‘제네바 기본합의’로 해소된다. 하지만 “핵을 가진 자와 악수할 수 없다”는 김영삼 정부(1993~1998)의 초강경 대북정책으로 인해 남북관계는 진전을 맺지 못한다.

  2.

  IMF 위기 속에 집권한 김대중 정부(1998~2003)는 선 평화, 후 통일이라는 통일정책을 근간으로 남북 간의 긴장 관계를 완화시키고 북한을 개혁과 개방으로 유도하기 위한 햇볕정책(sunshine policy)을 시행한다. 그 결과 2000년 6월,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서 ‘6.15공동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이로 인해 남북대화가 정례화 되고 남북경협사업(철도·도로 연결,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개발)이 물꼬를 트게 된다. 

  하지만 2001년 취임과 함께 9‧11 테러를 경험한 부시(George Walker Bush) 행정부(2001~2009)는 - 클링턴(Bill Clinton) 행정부(1993~2001)의 대북유화정책과는 달리 ABC(Anything But Clinton) 기치를 근간으로 - ‘일방주의, 선제공격’을 반영한 ‘국가안보전략’을 수립하면서 대북강경론을 펼치게 된다. 이때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고농축우라늄공장을 건설하고 있다는 미국중앙정보국(CIA)의 허위 사실에 근거해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하면서 일방적으로 ‘제네바 기본합의’를 파기한다.(2002년)

  이런 와중에 ‘국민의 정부’의 햇볕정책을 계승한 노무현 정부(2003~2008)가 등장한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북한의 핵 개발 시인 발언으로 인해 북미 관계가 경색국면에 놓여 있었다. 다행히 중국의 중재 하에 2003년 8월, 남과 북,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함께 참여하는 6자 회담이 시작된다. 그러나 6자회담은 3차 회담까지 북미간의 이견으로 인해 계속 교착 상태에 빠졌다가 이라크 사태 악화에 이어 카트리나 대재앙까지 겹치면서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던 부시 2기 행정부가 기존의 대북 강경 입장에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2005년 9월에 열린 제4차 6자회담을 통해 한반도비핵화, 관련국 간의 관계정상화, 북한에 대한 경제 및 에너지 지원을 골간으로 하는 ‘9.19공동성명’을 도출하게 된다. 하지만 ‘9.19공동성명’ 이행에 있어 미국이 미온적 입장을 취하자 북한은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통해 미국을 압박했고 다급해진 미국은 <행동 대 행동> 원칙에 입각한 ‘2.13합의’(2007년)를 통해 ‘9.19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비핵화 1단계 조치에 합의하게 된다.

  이어 2007년 9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 공화당의 중간 선거 패배와 이라크 전쟁의 참혹한 결과에서 벗어날 목적으로 - 부시 대통령은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성실하게 이행할 경우 한국전쟁을 종결시키는 평화협정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공동 서명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게 된다. 이를 계기로 2007년 10월에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고 같은 시간 베이징에서는 6자회담이 열리면서 북측 조치와 병행하여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과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한 비핵화 2단계 조치인 ‘10.3합의’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6자회담 무용론을 주장하면서 북한 붕괴론에 무게 중심을 두고 대화보다는 대북 제재를 통한 힘의 대결을 추구한 이명박 정부(2008~2013)의 등장으로 비핵화에 대한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만다.

  2009년에 출범한 오바마(Barack Obama) 행정부 또한 대북정책에 있어 동맹국인 남측 이명박 정부의 입장을 존중하여 북한의 태도 변화가 있을 때까지 인내하며 협상을 서두르지 않겠다는 -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로 표현되는 - 소극적 대북봉쇄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2003년부터 시작된 6자회담은 2007년 10월을 마지막으로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단 한 차례로 열리지 못한다.

  결국 북한은 자신들의 체제를 온전히 유지하기 위해 핵개발이라는 벼랑 끝 전술카드를 다시 꺼내어 들고 2009년 5월 2차 핵실험을 강행하면서도 지속적으로 평화협정을 위한 회담 개최를 제의했지만 미국에 의해 번번이 외면당한다. 그러나 2012년 12월 장거리로켓(인공위성) 은하3호 발사 성공과 2013년 2월 3차 핵실험 강행으로 인해 미국본토가 북한의 핵사정권 안에 들게 되자 다급해진 미국은 UN 대북제재 결의를 통해 북한을 압박함과 동시에 3월 11일부터는 대북선제공격이 포함된 키리졸브 훈련을 한반도에서 실시함으로써 북한과의 “무력대결”에 들어간다. 이에 질세라 북한도 정전협정 백지화와 1호 전투태세 돌입을 비롯한 핵전쟁 불사를 선언하면서 최악의 대결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3.

  1953년 휴전협정 이후, 평화협정이 채결되지 않은 남북의 현 상황은 엄밀히 말하자면 준전시상황이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는 곧 군사적 적대관계에 있는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전쟁을 개시할 수 있다는 북한의 안보 불안으로 이어진다. 특히 2011년, 핵무기 개발을 포기한 리비아 카다피 정권의 비참한 최후를 목도한 북한으로서는 미국과의 수교를 통한 안보 보장과 경제지원, 그리고 남북의 평화체제 수립을 절실히 원하고 있지만 미국은 이러한 북한의 입장을 애써 외면해 왔다. 그래서 북한이 끄집어 든 것이 바로 핵이라는 카드다.

  북한의 국가안보전략의 핵심이 되는 핵무기 개발은 2012년 12월, 은하3호 장거리로켓(인공위성) 발사 성공과 세 번에 걸친 핵실험 강행으로 어느 정도의 괘도에 진입했다. 이제 북한은 핵보유국 지위를 가지고 미국과 담판 지으려 하고 있다. 물론 미국이 이에 호응해 줄 리 만무하다. 오히려 미국은 ‘북한의 위협’을 이유로 한-미-일 3국 동맹을 강화하면서 북한을 압박할 것이며 중국과 국제사회의 용인을 얻기 위해 노력할 가능성이 높다.

  분명한 것은 북한이 정전협정 백지화와 전면전 위협 등의 극단적인 언사를 동원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평화협정에 대한 갈급함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정은 체제 하의 북한의 과녁은 휴전선을 맞대고 있는 남측이 아니라 자신들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미국이다. 그렇기에 현 한반도 위기 국면을 직접 조율할 수 있는 주체는 미국뿐이다. 지금도 미국이 어떤 행보를 하느냐에 따라 한반도의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의 생애 마지막 연설이기도 한 지난 2009년 7월14일 유럽연합 상공회의소 초청 연설에서 “북핵문제 해결방안은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국은 관계정상화를 위해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길뿐이다. 이외의 대안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2005년 공동성명을 강조하는 “9.19로 돌아가자”고 역설했다. 이는 한반도 위기의 본질이 북한의 핵보유에 대한 집착과 미국의 평화협정 외면에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따라서 갓 출범한 박근혜 정부(2013~)는 - 북한 체제의 붕괴 및 흡수 통일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이명박 정부를 반면교사로 삼아 - 미국의 체면도 살리고, 북한의 명분도 세워주고, 중국이 힘을 보탤 수 있도록 지혜를 간구해야 한다. 이를 통해 대북 제재와 압박을 자제하고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비롯한 최고위급 대화의 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 남-북-미-중 4개국이 정전협정을 대체할 한반도 기본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평화협정 안에 북한의 핵 폐기 대상, 시한, 방식을 정확히 명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북한의 핵폐기가 완료되면 북미, 북일 간의 수교를 통해 한반도의 평화체계를 이룩해야 한다. 세상 그 어디에도 좋은 전쟁, 나쁜 평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