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프랑스 정부는 국민을 단결시키고 기술진보를 장려하기 위해 1798년부터 11회에 걸쳐 국내 산업박람회(Exposition des produits de l'industrie française)를 개최하였다. 이에 영향을 받은 영국이 산업혁명의 성과와 자국의 위상을 만방에 과시하기 위해 1851년 런던 하이드파크(Hyde Park)에서 세계박람회(World Expositions)를 개최하게 되는데 이것이 세계박람회(만국박람회)의 효시다. 「엑스포(Expo)」라고 일컬어지는 박람회의 어원은 라틴어 ‘엑스포노(Expono)’에서 파생된 ‘엑스포지션(Exposition)’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뜻은 ‘드러내다, 진열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김차규, 2019). 「국제박람회에 관한 협약(Convention Relating to International Exhibitions)」 제1조에 의하면, ‘엑스포는 일반 대중의 교육을 주된 목적으로, 인류가 이룩한 과학기술의 업적과 문화적 성과를 토대로 인류문명이 나아갈 방향과 미래를 전망하는 행사’로 정의된다.
코로나19로 인해 2021년 10월 1일부터 2022년 3월 31일까지 182일간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서 열리고 있는 ‘2020 두바이엑스포(EXPO 2020 DUBAI)’는 중동지역에서 열리는 첫 세계박람회이다. 두바이엑스포에 건설된 한국관은 정보통신기술(ICT)과 결합해 ‘사막에 핀 꽃’을 형상화하였다. 총면적 4,651㎡(약 1,400평)에 지상 4층⋅지하 1층 구조로 지어진 한국관의 규모는 192개 참가국 중 다섯 번째일 뿐만 아니라 현지 언론들에 의해 '최고의 핫플레이스'로 꼽히는 곳이기도 하다(유정열, 한국경제, 2022.1.19). ‘한국이 인류의 미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겠다’는 의지를 담아 “Smart Korea, Moving the World to You”를 주제로 선정한 한국관은 드높아진 한국의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엑스포에 참여하였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나라와 세계박람회의 인연은 구한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과 함께 1883년 루시어스 푸트(Foote, L. H)가 조선의 초대 공사로 부임했고, 고종은 이에 대한 답례로 고종비 민씨의 조카인 민영익을 필두로 개화파 인사들로 구성된 보빙사(報聘使) 일행을 미국에 파견하게 된다. ‘답례로서 외국을 방문하는 사신’이라는 뜻을 지닌 보빙사는 조선이 서양국가에 처음으로 파견한 외교사절단이다. 총 13명으로 구성된 민영익 일행은 뉴욕에서 체스터 아서(Chester A. Arthur) 대통령을 접견한 후, 보스턴에서 열리고 있는 외국박람회(The American Exhibition of the Products, Arts and Manufactures of Foreign Nations)를 참관하게 된다(변종화, 1982). 민영익은 당시 서구의 첨단문물을 접한 후, “나는 암흑에서 태어나 광명속으로 갔다”라고 크게 감탄하였다(이각규, 2010). 이후 조선은 1893년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시카고박람회(Chicago World's Fair, The World's Columbian Exposition)에 처음으로 공식참가함으로써 국제사회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미국박람회 출품사무대원(美國博覽會 出品事務大員)으로 임명된 정경원을 비롯하여 국악단원 10명 등 총 13명이 박람회대표단으로 참가한 시카고박람회에 조선은 500달러를 들여 84㎡(약 25평) 규모의 전시장을 마련한 후, 박람회의 목적과 무관하게 관복, 삼회장저고리, 누비속바지, 대님, 도포, 망건, 갓, 토시, 버선 등 복식류와 가마, 도자기, 부채 등 생활용품, 그리고 투구덮개, 조총 등 군용품을 전시하였다(오룡, 2012). 전시회를 지키던 조선인이 관람객에게 일일이 대답하는 것이 힘겨워 다음과 같은 문구를 쓴 종이를 붙여 놓았다고 한다(김영나, 2000: 90 재인용).
"Korea와 Corea는 둘 다 틀리지 않지만 Korea로 써 주기 바란다. 조선은 중국의 일부가 아니라 독립국가다. 조선인은 중국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조선어는 중국어나 일본어와 다르다. 조선은 미국과 1882년에 조약을 맺었다. 여기 전시된 모든 물건들은 정부의 물건들이다. 조선은 전기를 쓰고 있고 증기선, 전보를 사용하지만 아직 철도는 없다. 조선인들은 기와로 만든 지붕과 따뜻하게 데워지는 마루가 있는 편안한 집에서 생활한다. 조선의 문명은 오래되었다. 면적인 십만 평방 미터이고 인구는 천 육백만이며, 기후는 시카고와 비슷하다. 지리적 환경은 산이 많고 광산물은 아직 덜 개발되었으며 쌀, 콩, 밀 등의 농산물들이 많다."
당시 미국 에모리대학을 막 졸업한 윤치호는, 약 10만 달러를 투자하여 3,680㎡(약 1,113평) 규모의 거대한 전시관을 개관한 일본과 달리, 초라한 조선의 전시물들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민경배, 국민일보, 2014.5.23).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1893년 9월 24일과 28일).
"조반 후 나는 박람회에 갔다. 모든 건물 위에 참가국들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는데 조선 국기만이 없었다. 가슴이 메어졌다. (중략) 나는 오전 11시에 조선관에 갔다. 그리고 거기서 오후 5시까지 서 있었다. 왜 무엇을 위해 그랬었나,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나, 다만 나는 그 처참한 모습에서, 내 나라의 모습에서, 눈을 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은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지 3년 후인 1900년 파리박람회에 참가한 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의 이유로 불참하다가 1962년 미국 시애틀엑스포를 계기로 다시 참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정 엑스포'에 해당하는 대전엑스포(1993년)와 여수엑스포(2012년)를 개최하게 된다. 참고로 엑스포는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는 '등록 엑스포(Registered Exhibitions)'와 명확한 주제를 지닌 '인정 엑스포(Recognized Exhibitions)'로 나뉜다. 부산은 2030년 등록 엑스포를 개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참고자료]
김영나(2000), "박람회라는 전시공간: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와 조선관 전시",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13, 75-111.
김차규(2019), “1차 산업혁명과 박람회(1798-1900)”, 『인문과학논총』 40(3), 177-201.
민경배(2014), “알렌과 시카고 세계박람회”, (국민일보, 5.23)
변종화(1982), "1883년의 한국사절단의 보스튼 방문과 한미 과학기술 교류의 발단", 『한국과학사학회지』 4(1), 3-25.
오룡(2012), “우리나라와 세계박람회”, KDI 겅제정보센터.
유정열(2022), “두바이 사막에 핀 꽃 '한국관'”, (한국경제, 1.19)
이각규(2010), 『한국의 근대박람회』, 커뮤니케이션북스.
2020 두바이엑스포 한국관(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