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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예술산책

오이디푸스 서사구조(1)

오이디푸스 서사구조(1)

 

1. 오이디푸스 시나리오 서사 구성 원리와 쾌락


  서사에서 오이디푸스를 말할 때, 다음의 두 가지를 먼저 언급해야 한다. 첫 번째가 욕망의 문제이다. 이것은 서사를 움직이는 동력이 욕망이라고 보고 욕망의 주체가 서사 안에 자리 잡는 과정을 주목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욕망과 법률의 문제이다. 여기서는 욕망과 법률의 갈등이 서사의 바탕을 이룬다는 전제하에 오이디푸스 신화가 보여준 아버지-아들의 경쟁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다.

  전자와 관련하여 가장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준 논객은 롤랑 바르트(R. Barthes)이다. 그는 이야기의 시초에는 욕망이 있음을 주장한다. 욕망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의 후기 저작인 『S/Z』(1970)와 『텍스트의 즐거움』(1973)에 뚜렷이 나타난다.

  이러한 바르트의 논의는 1980년대에 서사학이 영화이론의 주된 관심사로 자리매김하는데 지배적인 역할을 한다.
  이때 그의 영향력이라 함은 욕망과 주체성이라는 개념을 서사의 핵심적 부분으로 도입했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욕망에 입각한 서사성과 쾌락 논의를 전면화 시켰다는 점에서 찾아진다.

  후자의 경우에는 권력과 욕망의 갈등 문제가 중요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법률이란 아버지의 목소리이며 권력의 힘을 의미한다. 욕망은 항상 법률과 부딪히기 마련이며, 이렇듯 욕망이 법률의 질서를 위반하는 과정이 이야기의 뼈대를 이룬다. 바르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이야기가 주는 즐거움이 이러한 법과 욕망의 갈등에서 나온다고 지적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오이디푸스와 아버지와의 갈등은 서사적 쾌락의 근원적인 요인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문학의 즐거움 중 많은 것을 빼앗아 간다. 만일 그곳에 더 이상 아버지가 없다면 왜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모든 이야기 형식은 오이디푸스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가.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항상 우리의 기원을 찾는 방법이 아닌가. 법과 우리의 갈등을 말하고 부드러움과 증오의 변증법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던가.”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김명복 譯, (서울: 연세대출판부, 1990), 51.

  여기서 바르트가 말하는 아버지란 사회적 권력이나 제도적 권력, 질서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와 맞서야 했듯이 모든 이야기의 욕망들은 질서에 맞서야 하며, 오이디푸스가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듯이 이야기의 욕망들은 질서의 그늘 속에서만 움직여야 한다.

2. 오이디푸스 구조의 존재방식과 서사적 쾌락


  “테에베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 사이에 태어난 오이디푸스는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이 아이는 아버지를 살해할 것이라는 신탁이 부왕에게 내려졌기에 낳자마자 버려졌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구제되어 다른 나라의 궁중에서 왕자로 양육되어 자라났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알고 싶어서 신에게 물었고, 그는 ‘너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아야 하게 될 테이니 고향 땅을 피하라’는 신탁을 받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고향이라고 생각했던 나라를 떠나가다가 도중에 아버지인 줄도 모르고 라이오스 왕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심한 말다툼이 벌어져 그만 그를 죽여 버린다. 
  이윽고 테에베에 도착한 오이디푸스는 이곳에서 길을 막고 수수께끼를 던지는 스핑크스의 질문을 푼 감사의 대가로 테에베 사람들로부터 왕으로 추대되어 이오카스테를 아내로 맞게 된다. 그는 오랫동안 평화스럽게 나라를 다스리고 친어머니인 줄도 모르고 이오카스테와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얻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라 안에 나쁜 병이 유행했고 테에베 사람들은 이것에 대한 신탁을 청하게 되는데 소포클레스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사자들에게 내려진 신탁에는 라이오스를 살해한 사람이 이 나라에서 추방될 때에 유행병은 그칠 것이라는 예언이다. 
  연극의 줄거리는 - 정신분석의 작업과 비슷하게 - 한 걸음 한 걸음 높여지고 교묘하게 연장되면서 끝을 맺는다. 즉 오이디푸스가 바로 라이오스 왕을 살해한 범인임과 아울러 오이디푸스는 살해된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 사이에 난 아들임이 폭로된다. 모르고 범했다고는 하나 죄의 무서움에 마음이 아파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찌르고 고국을 등진다. 이렇게 하여 신탁의 예언은 실현된다.”

  위의 이야기에서 오이디푸스는 아래와 같이 세 번의 결정적인 변화를 겪는다.
  ① 어린 시절에 아버지의 버림을 받아 집으로부터 이탈되는 것
  ② 아버지를 죽이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후 테에베의 왕이 되는 것
  ③ 스스로의 정체를 알게 된 후 테에베를 떠나 죽음의 길을 걷는 것 

  여기서 가장 먼저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은 오이디푸스의 통과제의이다. ①과 ②의 변화는 미성년의 외디푸스가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된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집인 코린스를 떠나 여행을 시작하는 시간은 그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시간이면서 영웅의 지위가 완성되는 시간이다. 이 같은 통과제의의 구조는 민담의 영웅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프로프의 『민담의 형태학』에 따르면 통과제의는 민담의 핵심적인 서사 장치이다. 주인공은 집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하게 되고 여행 도중에 위기에 몰리게 되지만 이 절박한 상황에 영웅은 위력을 발휘한다. 위기가 해결되는 데에는 강력한 원조자의 도움이 큰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위기의 순간이 지나면 진정한 영웅이 탄생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이 과정을 통해 익명의 미미한 존재에서 유명한 영웅적 존재로, 미혼의 미성년자에서 기혼의 성년자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여행의 시공간변화는 영웅의 사회적 지위변화와 함께 진행된다. 프로프가 분석했던 동화 속 주인공처럼 오이디푸스도 세 가지 모험을 통과한다. 늙은 왕을 죽이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도시의 고난을 제거하는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왕위에 오르고 여왕과 결혼하게 되는 것은 그 보답인 셈이다. 이러한 이야기 진행은 민담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의 통과 제의가 민담과 같을 수는 없다. 청년기의 오이디푸스는 신탁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암시받고 여행의 길을 떠난다. 이 여행은 우연한 여행이지만 목적 없는 방황은 아니다. 자신의 혈통과 본질을 찾겠다는 뚜렷한 목적을 지닌 여행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내가 자신의 어머니이며 스스로의 손으로 아버지를 죽였다는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절망한다. 그는 결국 목적을 달성한 패배자인 것이다. 자신에 대한 반성은 이러한 패배의 순간에 발생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민담과는 차별되는 오이디푸스의 위상이 분명해진다. 즉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행위를 판단하고 반성하는 주체라면 민담의 주인공들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일련의 행위들을 재현하는 기호이자 비유형상에 지나지 않는다. 민담의 경우 개별적인 인물들의 고유한 성격이나 내면의 심리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단지 그들의 행위 자체, 그 행위의 원인이나 결과, 의미와 가치 등이 중요시 될 뿐이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양부모의 손에 양육된 인물이며, 후에는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계승하지만 어머니와 결혼해야 하는 비극적인 운명의 소유자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아버지의 권위를 얻겠다는 오이디푸스적 욕망을 드러낸다. 이 욕망 속에는 아버지를 닮고자 하는 모방 충동이 개입되어 있다. 어른이 되고 아버지를 계승하고 아내를 맞아들이는 것은 아버지의 위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민담의 경우와도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독특한 점은 이러한 성장이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민담의 주인공은 집을 떠나 공주의 나라로 가서 장인의 인정을 받고 그곳의 왕이 된다. 따라서 아들이 아버지와 갈등할 필요는 없다. 그는 아버지와의 갈등을 피함으로써 아버지가 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공주의 나라로 가지 않고 자신의 나라로 되돌아온다. 그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여야 하고 아버지의 아내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어야 한다. 여기서 어머니와의 결혼은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열망임과 동시에 아버지의 법률 - 근친상간이 금지되어 있는 것 - 을 깨려는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아버지를 닮으려는 모방욕구, 아버지의 세계를 깨고 싶어 하는 충동욕구, 에로틱한 욕망, 금기를 위반하려는 욕망, 법률의 우두머리가 되려는 욕망 등 오이디푸스 이야기에는 다양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권위에 의존하고자 하면서도 또한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상반된 욕망이 여러 형태로 모습을 바꾸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의 다양성은 서사적 쾌락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쾌락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욕망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쾌락 또한 욕망만큼이나 다양해진다. 지배의 쾌락, 복종의 쾌락, 에로틱한 쾌락, 위반의 쾌락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즐거움은 서로 다른 욕망들이 하나의 이야기 안에 공존하며 상충하게 되는 그 과정에서 나오는 쾌락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과 더불어 지적할 또 하나의 특징은 오이디푸스 구조가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익히 알려졌듯이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와 지적인 대결을 수행한다.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도 오이디푸스의 비밀을 둘러싼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과정이다. 즉 이야기 전체가 모두 오이디푸스의 수수께끼를 중심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수께끼는 풀려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비밀의 이면에는 무언가가 있으며 또 그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항상 알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는 진실이 아직 나타나지 않는 것에 의해 전개된다. 이야기의 움직임은 해결의 도래를 재촉하면서도 해결의 순간을 연기하려 한다. 사건의 배열 방식은 수수께끼의 단서나 정보의 조절과 관련되므로 서사적 인과성이 없는 우연적인 것들은 반드시 배제된다. 즉 믿기 어려운 우연이나 무의미한 반복은 제거되고 빈틈이 없는 서사체로 구축된다는 것이다.

  수수께끼가 주는 쾌락은 우선 이렇듯 긴밀한 구성의 정제미에서 나온다. 추리물이 주는 흥미는 수수께끼의 핵심에 도달하게 되는 추론의 논리적 과정에 있다. 다양한 퍼즐과 수수께끼가 계속 공급되고 해결이 지연되고 더러는 부분적으로 해결되면서 쾌락은 계속 공급된다. 그래서 빌 니콜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쾌락은 지연되지 않는다. 텍스트 전체에서 쾌락이 유발되기 때문이다. 다양한 퍼즐과 수수께끼는 계속 주어지기도 하고 지연되기도 하며 부분적으로는 해결되기도 한다. 더불어 이러한 수수께끼는 잊혀지거나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수수께끼가 펼쳐지는 그 순간은 곧 우리가 이야기에 몰입하는 순간이다.” Bill Nichols, Ideology and the Image,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1), 112.

  잘 다듬어진 이야기는 적잖은 쾌락을 제공한다. 이러한 쾌락에 우리가 유혹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알고자 하는 욕망, 보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수수께끼는 이러한 욕망을 부추기고 그 욕망이 결국엔 만족될 것을 약속하는 흥미로운 형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수께끼가 주는 쾌락은 오이디푸스 구조의 것만이 아님은 확실하다. 추리물이나 탐정영화 등에서도 이러한 수수께끼가 서사의 전체 흐름을 시종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리물의 일반적인 문법에서 탐정은 그가 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혹은 그 문제의 의미는 무엇인지 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탐정에게 중요한 것은 문제를 푸는 일이지, 그 문제의 의미를 묻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추리물의 탐정은 철저히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해 무반성이다. 바로 이것이 추리물이 매우 지적인 것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진지한 이야기가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경우는 다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탐정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풀어야 할 이야기는 다름 아닌 자신의 기원 내지는 정체성에 관한 비밀이기 때문이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만큼 뛰어난 탐정인 오이디푸스는 결국 문제를 풀게 되지만 이로 인해 절망하게 된다. 의미에 대한 반성은 이러한 절망의 순간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이디푸스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목적을 달성한 패배자인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자기발견의 스토리가 또 다른 쾌락을 유발한다. 즉 주체의 개인적 역사를 기억하고 자아(ego)를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쾌락이 유발되는 가장 적극적인 서사의 힘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온 것을 정리하자면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자신이 탐정으로 등장하는 반성적인 추리물이면서 동시에 오이디푸스의 자기발견에 관한 성장담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문제를 해결함에서 오는 의기양양한 승리감도 있고 승리 끝에 당면하게 되는 반성과 회의의 순간도 있다. 또한 자기발견에의 욕망이 존재하는 것처럼 자기소멸의 충동도 목격된다. 한편에 동경과 열망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회의와 절망이 놓여있다.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이 동시에 맞물려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역설이 오이디푸스의 세계를 살찌우는 원동력이 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