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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예술산책

오이디푸스 서사구조(2) - 베트남전 영화를 중심으로

오이디푸스 서사구조(2) - 베트남전 영화를 중심으로

 

서사성의 원리와 오이디푸스 이데올로기

 

  서사학에서 꼭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 중의 하나가 이데올로기 문제이다. 이 문제는 롤랑 바르트의 『신화지』(Mythologies)에서부터 프레드릭 제임스의 『정치적 무의식』(The Political Unconscious)에 이르기까지 서사학의 중심적인 논제였다. 

  이 논의들을 통해 공유된 부분으로는 서사라는 것에는 - 객관적인 구조물이 아닌 - 항상 이데올로기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것과 인간 세계를 이해함에 있어 우리의 인식 또한 서사를 통해 이루어지므로 그 인식의 전반에 있어 이데올로기의 개입은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학파나 그들의 추종자들은 대중문화를 이데올로기와 동일시시킨다. 그들이 보기에 대중문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들이 느끼는 절망적인 공허함을 잊게 하기 위해 제공된 다양한 형태의 쉽고도 거짓된 쾌락이며, 그 결과 대중들은 더 커지고 광포해서 괴물인 대중문화의 올가미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영화를 위시한 대중문화는 관객에게 강력하면서도 교묘한 이데올로기적 통제를 가하고 있으며, 이때 그 통제는 제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통제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주입을 통해 우선은 그 이데올로기에 수동적 순응을 하게끔 한 후, 결국에는 거짓 자발성에의 함몰을 이루고자 한다는 것이 대략의 요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과는 달리 롤랑 바르트는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적 통제가 모든 관객에게 가능한 것은 아니어서 비판적 독해를 수행하는 적극적 관객은 통제의 범위를 넘어설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바르트의 견해도 대중문화가 ‘위조된 조화’(이데올로기)를 어떤 갭이나 모순 없이 창출하여 대중에게 주입시킨다는 입장을 버리지 않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오이디푸스 구조가 주류 영화의 중심적인 뼈대로 설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오이디푸스 구조는 이미 명료하게 의식된 상태로 주어진 이데올로기를 영화적으로 반영, 표현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무비판적으로 수용케 만드는 주요한 수단으로 이미 지배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문제와 관련해서 오이디푸스 시나리오를 가장 강력하게 비판한 진영은 정신분석과 페미니즘이다. 대표적 이론가로는 로라 멀비와 테레사 드 로레티스, 거들린 스터들러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의 입장은 아래 로빈 우드의 글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급진적인 페미니즘이 오락이나 쾌락과 양립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결론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쾌락을 지배하는 코드는 오래된 가부장제의 습성들이며, 이들은 전통적으로 제한된 ”보는 방식“을 지니고 있고 문화적으로 고정된 여성성/남성성의 이미지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페미니스트 영화제작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과 곧바로 충돌할 것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이분법은 멀비의 논문 ‘내러티브 형식과 시각적 쾌락’과 영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 의해 더욱 굳혀진 듯하다. 특히 멀비의 영화는 13쇼트로 이루어졌고 도전적이고 이론적으로도 흥미롭지만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쾌락’을 여지없이 박살해 놓는다.” Robin Wood, "Narrative Pleasure: Two Films of Jacques Rivette", Film Quarterly, fall 1981, 11-12.

  그렇다면 대안영화의 입지는 넓지 못하다. 쾌락 대신에 무엇을 대치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이들은 ① 상업적인 이해관심과 몸을 섞어 ‘가짜욕망’을 유포하는 대중영화로 진입할 것인지, 아니면 ② 관객과 담을 쌓은 고립된 지적작업에 머물 것인지 이 두 가지의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를 가부장제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 해석하기 보다는 특정한 계급 또는 집단의 특정적인 믿음체계로 바라본다면 그것은 지배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고 대항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다. 따라서 서사가 이데올로기와 긴밀히 결합하고 있다면 이 두 가지 이데올로기 모두에 연관되어 있는 것이며, 서사를 찾는 욕망이나 서사가 제공하는 쾌락 또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그것을 어떻게 운용하는가에 따라 지배적인 의견의 체계에 봉사할 수도 있고 그것을 부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서사적 쾌락과 이데올로기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성찰은 그 관계라는 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고 텍스트의 의미에 따라 가변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오이디푸스적 이데올로기의 내적 형식과 그 의미


  베트남전은 미국인에게 있어 혼돈과 치욕의 역사이다. ‘베트남 신드롬’으로 대변되듯, 베트남전의 패배는 개인적 상처와 역사적 상처를 아우르는 문화적 충격을 미국인들에게 안겨다 주었다. 그러나 전쟁이 치러질 당시 베트남전을 ‘최초의 TV전쟁’이라 칭할 정도로 TV가 대중들에게 전시상황을 가까이서 생생하게 보도해 주었지만 영화는 전쟁이 진행되는 기간 내내 침묵하고 있었다.

  헐리우드가 한참 동안의 칩거를 깨고 본격적으로 베트남전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말에 이르러서였다. 그 후 8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하나의 하위 장르로 정착될 만큼 절정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베트남전 영화를 요구하는 관객의 욕망은 무엇이며 관객의 보상심리를 만족시켜주는 특정한 서사구조는 어떤 것이며 그것이 수행하는 구체적인 역할은 무엇인가 물을 수 있다.

  우선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은 베트남전 영화가 미국의 참전을 둘러싼 찬반 논의의 치열한 장이 됨과 동시에 대중의 상처를 다스리는 방편으로도 기능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영화가 역사에 개입하고 그것을 진실되게 묘사하고 있는가의 문제 이외에 또 다른 변수, 즉 상업성 내지 대중성을 고려하자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이 내세우는 입장이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간에 영화는 자본주의의 가장 유력한 상품이며 관객의 욕망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대상황을 조금만 유심히 들여다본다면 이러한 베트남전의 인기 이면에는 70~80년대 미국문화와의 어떤 맞물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0년대 말은 미국이 보수적 경향으로 다시 회귀하기 시작하던 때이다. 60~70년대를 특징짓던 자유주의 물결이 후퇴한 반면 미국의 정치 세력으로 신우파가 득세하고 급기야 레이건 시대의 미국은 신군국주의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세계를 향해 더욱 호전적인 자세를 취하기에 이른 것이다. 레이건적 보수주의가 승리한 데에는 당시의 세계정세가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보다 본질적인 요인으로는 대중들에게 만연된 수치심과 상실감이라는 사회 심리를 완화시킬 보상욕구를 개발하는데 보수진영이 능했다는 점이다.

  이때의 보상 매커니즘이란 곧 패배감에서 오는 수치심을 백인 이외의 인종 내지 미국인 이외의 민족에 대한 적의와 폭력적 대응으로 전환시켜 버리고 군사력의 증강과 잃어버린 남성성의 신화적 복원을 통해 이전의 상실감을 보충하려는 움직임을 말한다. 물론 이러한 보수화에 대한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유진영은 여전히 신군사주의를 저지하는 문화적 대항을 수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전 움직임과 평화운동을 군사외교정책의 제도적 장치로 연결시키는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들을 수치심에서 건져 올릴 보상 매커니즘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기 때문에 점차 그 대중적 지지를 잃게 된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베트남전 영화는 이러한 문화적 흐름을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람보>와 같은 코믹한 영웅물을 통해 우파 영화는 전쟁의 정당성을 주창하며 미국의 신화를 되찾기 위한 애국주의에 집착하는 반면, 비판적인 영화들은 월남전의 무의미함과 군부의 부패와 타락을 강조하며 군사 중심 정책을 공격한다. 두 진영의 정치적 견해는 반전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로 구별될 정도로 분명히 차별적이다.

  하지만 관객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는 이 두 가지 태도가 모두 유용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우선 보주신영이든 자유진영이든 간에 역사를 대하는 방식이 동일하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베트남은 지옥과 같은 곳이고 그 속에서 싸워야 했던 미군 병사는 가엾은 희생자이며 그들이 입은 상처가 깊다는 것을 대부분의 영화가 강조하지만 그들이 입은 상처를 드러낸다고 해도 그 상처의 역사적, 현실적 뿌리를 보여주는 일은 전혀 없다.

  즉 자본주의와 신식민주의의 결합이라는 베트남전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을 언급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전쟁에 대한 비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미국인 내부의 분열이나 부패를 향한 것에 그칠 뿐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재현된 역사의 진실성 여부가 아니라 베트남전 영화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서사구조이다. 패배한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응하는 지배적인 서사양식이 목격되기 때문이다. 즉 오이디푸스적 서사 구조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 전쟁영화가 다른 영화에 비해서 현저히 오이디푸스적 구조를 담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전쟁영화는 전쟁이라는 폭력적인 상황에서 폭력적인 수단으로 권력을 얻으려는 투쟁에 초점을 맞춘 ‘전형적인 남성적인’ 환타지 시나리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대부분 전형적으로 남성적인 오이디푸스 드라마와 딜레마, 갈등을 불가피하게 포함하기 마련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앤터니 이솝프는 4가지 구조적, 아이콘적 양상을 중심으로 전쟁영화를 설명한다. 

  “지배문화의 남성적 형식이라 할 수 있는 전쟁은 네 가지 결정적인 계기들을 둘러싸고 구조화된다. 패배, 전투, 승리, 동료애가 그것이다. 여기에 응하여 네 가지의 사진 이미지가 등장한다. 첫째는 공포스런 전장의 풍경, 둘째는 전투 장면, 셋째는 승리의 순간 - 가령 상징적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칭찬을 얻어내는 순간이 그것이다. - 넷째는 앞의 세 가지와 결합된 이미지라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동료애의 순간으로, 예를 들면 부상당한 친구로 인해 울고 있는 병사를 보여주는 장면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순간이나 이미지들은 정신분석학에서의 거세 공포와 남성 에고의 승리, 아버지와 아들, 남성들의 연대라는 이상화된 친밀한 관계에 대응될 수 있다.  Antony Easthope, "What a Man's Gotta Do", The Masculine Myth in Popular Culture, (London: Paladin, 1986), 63.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성성이 전쟁영화의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쟁영화야말로 남성성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확산시킨 매우 중요한 장르인 것이다. 그러나 전쟁영화, 전투 장면, 전쟁을 재현하는데 지배적으로 등장하는 구조적 순간은 단지 남성성에 관한 것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남성성만이 아니라 전쟁과 복지, 민족성, 국가정책과 이상 등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일 베트남전 영화가 남성성을 강화했다면 그것은 남성성 대 여성성의 대립구도보다는 베트남전에서의 패배자라는 미국인들의 위기의식에 대한 문화적인 반응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될 부분은 ‘위기’에 대한 영화의 응답이 영웅적 남성 주체를 구현하는 오이디푸스 서사구조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베트남전 영화의 서사구조가 보여주는 현저한 특징 중의 하나로는 베트남전의 서사가 주인공 개인의 시각을 중심축으로 해서 이루어지며, 시점 샷과 보이스 오버 나레이션의 빈번한 사용을 통해 주인공의 시점을 다른 시점보다 우월한 것으로 만듦과 동시에 관객이 주인공에 쉽게 동일시되도록 한다는데 있다. 또한 주인공이 성인으로 제시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보통 순진하고 인간적이지만 아직은 어린 병사로 설정된다. 영화의 시작은 이 어린 병사가 오이디푸스적 상황에 처하는 순간이 되며 어린 그가 전쟁의 경험을 통해 정신적, 육체적으로 성장하게 되고 드디어 성인의 수준으로 올라섰을 때 이야기는 마감된다.

  전쟁의 경험은 성인으로 성장할 발판이 된다는 것, 달리 말해 주인공이 주체적인 인간이 되기까지의 통과제의가 전쟁터에서 이뤄진다는 것이야말로 베트남전 영화의 핵심적 면모이다. - <플래툰>, <풀 메탈 자켓>, <햄버거 힐>이 모두 순진한 젊은이의 성장의식을 그려내고 있다. - 주인공이 갖는 이와 같은 순진함은 서사구조와도 연관된다.
  다시 말해 압도적으로 우월한 서사 주체의 자리에 순진하고 도덕적인 주인공이 머물고 있을 때, 관객은 그의 입장과 쉽게 공유하며 그의 생각을 넘어서기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주인공의 정체성을 영화가 대변하는 입장으로 나아가 국가가 대표하는 정체성으로 확장하는 전략을 가능케 한다. 주인공의 관점은 그 영화의 정치적 견해를 관객에게 주입하는 수도관이 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람보나 척 노리스 류의 영화를 제외한다면 미국의 베트남 참전에 대한 비판은 영화 도처에 존재한다. 이것은 전쟁의 패배를 맛본 대중들이 공유하는 감정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의 순간은 대부분 젊은이를 착취하는 군대를 보여주는 것에서 그친다. 다시 말해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생존하기 위해 싸우는 젊은이, 그런 젊은이를 이용해먹는 군대를 비난하는 선에서 멈춘다는 것이다. 간혹 진지한 영화인 경우 미국 군대의 도덕적 타락이나 부녀자 살해와 같은 미묘한 사안을 다루기도 한다. 하지만 이 경우도 역시 개인적인 과도함이나 관료적인 실수에만 비판이 가해진다. 개인적인 성격 차이로, 부정 공무원을 비난하는 관점을 제공하면 그뿐인 것이다.

  여기에는 2차 세계대전의 윤리적인 승전국이라는 환상적인 국가 정체성을 다시 세워보겠다는 욕구가 숨어있다. 패배자를 위해 싸우는 나라, 부녀자와 아이를 구해주는 나라, 문화적 인종적인 차이를 존중하는 나라가 미국의 정체성이라는 환상을 되찾아보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 정체성 다시 세우기’가 젊은 병사의 오이디푸스 시나리오에 의해 가능해진다는 사실은 오이디푸스 구조가 이데올로기의 결합에 얼마나 용이하게 이루어지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전쟁의 사상자들 / Casualties of War>(1989)의 예를 들어 보자.
  이 영화에는 미국이 베트남 땅에서 지니는 본질적 의미가 부녀자 강간 살해라는 끔찍한 사건을 통해 비유적으로 표현된다. 베트남전 영화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감독의 시각과 관객의 관점, 나아가 미국인의 양심을 대변하는 인물로 젊은 신병을 설정하고 그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선한 전쟁’에 대한 이상에 젖어있는 주인공은 베트남 소녀를 납치, 강간하고 결국에는 살해하는 동료 분대원들의 도덕적인 타락을 목격하고 이것을 저지하고 고발하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실패한다. 그의 이러한 고발행위는 곧 전쟁을 유발한 미국의 행위를 비판하는 것으로도 읽혀질 수 있지만 여전히 전쟁의 모순을 단지 미국인 개인의 부패나 과도함에만 초점을 맞춰 설명하는 통상적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올리버 스톤의 <플래툰 / Platoon>(1987)에서도 마찬가지다. 스탠리 큐브릭의 <풀 메탈 자켓 / Full Metal Jacket>(1987)이 그러하듯, <플래툰>은 80년대 레이건주의로 대변되는 신군사중심 정책에 반항하는 영화이다. 전쟁을 더럽고 추악하며 의심스러운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보수주의 시대에 신화화에 몰두하는 영화들과는 명백히 반대 입장을 고수한다. 하지만 그 속에도 미국적 가치에 침윤되어 있음이 엿보일 뿐 아니라 베트남전의 일차적인 문제를 미국인들의 마음속에서 해결될 성질의 것으로 처리해 버렸다는 한계를 지닌다. 베트남전을 둘러싼 역사적인 맥락은 제거한 채 성격이 이질적인 두 상사간의 갈등을 통해 미국 내의 두 노선 - 보수주의 vs 진보주의 - 으로 분열된 흐름을 제시하고 이들의 결속을 세계의 모순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사전략은 이데올로기적 목적만이 아니라 관객의 욕망을 만족시키려는 산업적 욕구에 부응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관객은 상처의 현장을 보면서도 즐거울 수 있다. 영화는 전쟁에 대한 책임감을 강요하며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 관객은 도덕과 양심을 간직하고 있는 순진한 젊은이와 동일한 위치에 자리 잡기 때문에 전쟁의 모든 책임감에서 사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비판의식은 소유하되 부패의 원인들과 일정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죄의식이나 책임감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관객은 홀가분하게 극장문을 나서게 된다.

  이러한 베트남 영화에서 확인한 것은 오이디푸스 구조가 현실의 모순성을 감추는 목적으로 사용되고 국가 정체성의 재건을 위한 유용한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가 곧바로 ‘오이디푸스는 항상 지배 이데올로기를 견고히 한다’는 식의 결론으로 연결되는 것은 부당하다. 오이디푸스 구조는 지배적인 담론에만 매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구조 자체가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고정되지 않다는 얘기다.
 
  <보이즈 앤 후드 / Boyz N The Hood>나 <카프카 / Kafka>, <양들의 침묵 / The Silence of the Lambs>, <말콤 X / Malcolm X>, <밴디트 퀸 / Bandit Queen>, <일 포스티노 / The Postman,Il Postino>와 같은 영화들이 그러한 예일 것이다. 여기서 오이디푸스 구조는 기존 세계의 질서가 믿음직스럽지 못하며 지배 이데올로기는 항시 현실과 분열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오이디푸스 구조가 사회적 조건과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사회적 조건의 정황 속에서 얼마든지 유연하게 변형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