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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마르 카다피(Muammar Gaddafi),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무아마르 카다피(Muammar Gaddafi),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무아마르 카다피(Muammar Gaddafi / 1942~2011)가 그의 고향 인근에서 체포되었다. 리비아 미스라타 군사위원회는 10월 20일(현지시간) 반군 소속 병력에 의해 카다피가 생포되었으나 이후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를 하였다. 곧이어 리비아 임시정부인 NTC 마무드 지브릴 총리 또한 카다피 전 국가원수가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1969년 육군 대위 신분으로 친서방 성향의 왕정을 무혈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은 카다피는 곧바로 왕정을 폐지하고 혁명평의회가 지배하는 리비아아랍공화국을 세운 후,  혁명평의회 의장이자 국가원수, 군사령관이 되어 지난 42년 동안 리비아를 장기집권 하면서 반미주의를 근간으로 미국 군사기지를 철수시키고 외국 자본을 추방함과 동시에 외국의 석유 회사들을 추방하고 석유를 국유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해운, 항만, 항공 등의 기반시설도 국유화와 국영화로 전환시켰다. 이와 함께 카다피는 리비아의 대수로를 건설하고 사막에 유전을 개발하여 리비아를 아프리카의 빈국에서 경제 부국으로 탈바꿈시켰다. 하지만 2011년 초, 중동 및 북아프리카 지역의 재스민 혁명(Jasmin Revolution)[각주:1] 등과 맞물리며 반정부 민주화 시위가 일어난 지 8개월 만에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로널드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 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중동의 미친 개”라는 비난까지 들었던 카다피는 갖은 기행으로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처녀로만 구성된 중무장 여성 경호대, 미모의 우크라이나 출신 간호사 없이는 여행하지 않는 습관, 2009년 뉴욕 유엔 총회 당시 유목민풍의 텐트를 숙소로 고집한 일화 등은 유명하다. 어디 그뿐인가? 당시 유엔총회에서 15분으로 예정된 연설을 96분 동안 진행해 구설수에 오른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일화 중 하나이다. 이때 카다피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 일침을 가하며, 유럽국가들이 아프리카의 식민지 역사를 가진 나라들에 대하여 보상을 해야한다고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버락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 미국 대통령에 대해 “아프리카의 아들이 미합중국의 대통령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고 한다.

  그의 체포와 죽음에 대한 기사들이 계속 속보로 올라오고 있는 가운데, 그는 현존하는 전 세계 집권자 중 가장 오랫동안 철권통치를 이어온 독재자로 소개되어지고 있다. 과연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서방언론을 통해 정보를 얻고 있는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카다피는 대부분의 아프리카인들에게 관대한 사람, 휴머니스트, 그리고 남아프리카의 인종주의 정권에 대항하여 싸우는 투쟁을 아낌없이 지원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일례를 들어 보자. 2007년 이전, 아프리카는 통화를 위해 유럽의 위성들을 사용하고 있어 매년 5억 달러의 사용료를 지불하고 있었다. 만약 아프리카가 직접 운영할 수 있는 위성을 설치한다면 설치를 위한 비용 4억 달러 외에 다른 비용을 매년 지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프로젝트에 융자를 해주는 은행이 없었다. 이때 카다피의 리비아가 3억 달러를 내놓은 것을 계기로 2007년 12월, 아프리카 소유의 최초 통신위성을 갖게 됨으로써 서구세계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리비아가 이렇게 거금 3억 달러를 내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리비아의 중앙은행이 100% 국가 소유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리비아의 은행시스템은 자국에 필요한 자금을 직접 국가가 찍어내기 때문에 이자 없이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플레 없는 완전고용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이자가 없어지면 공적 사업에 드는 비용을 평균 50% 정도 줄일 수 있다고 한다.) 

  반면 세계적 금융카르텔의 입장에서 볼 때, 리비아와 거래를 하자면 리비아중앙은행을 통해야 하고 리비아 국가화폐를 사용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다른 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지배력을 전혀 행사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리비아 중앙은행은 약 144톤의 금을 보유하고 있어 국제결제은행(BIS)이나 국제통화기금(IMF)의 영향력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따라서 서방 세계의 입장에서 볼 때, 카다피는 ‘눈의 가시’와 같은 존재였을 거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런 그가 달러와 유로를 모두 거부하고 아프리카 2억 인구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통화, 즉 '골드디나르'(gold dinar)를 사용하는 통합아프리카대륙의 건설을 제안했으니 서방세계가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한 것이다.

  물론 42년이란 긴 세월 동안 리비아의 권력을 독점한 것을 마냥 칭송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그가 치리하였던 42년 동안 리비아의 상황은 어땠을까? 
  우리의 일반적 예측과는 달리, 리비아인들은 모두 무상의료 혜택을 받을 뿐만 아니라 리비아 병원들은 최고 수준의 의료장비를 갖추고 있다. 유능한 젊은이에게는 정부 지원의 해외유학 기회가 주어지고, 결혼할 때는 이자가 없는 정부대출금(약 5만달러) 지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어디 그 뿐인가? 농업종사자에게는 세금이 면제되고, 가솔린과 빵은 헐값이며, 정부보조금으로 인해 자동차가격은 유럽보다 저렴해서 대부분의 가정이 차를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유엔이 카다피를 시위군중 탄압을 이유로 격렬히 비난하는 동안 정작 유엔 인권위원회에서는 리비아의 인권 상황을 칭송하는 보고서를 막 채택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카다피는 앞에서 언급한 이런저런 이유로 2003년에 제9회 불교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카다피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졌다. 그의 죽음 이후 구성될 리비아 정부는 친미, 친유럽적 성향을 가진 정부일 것이며, 이들 정부는 이전과 달리 서방세계의 통제하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역사는 친미, 친유럽적 관점에서 지난 42년을 새롭게 재구성하게 될 것이다. 역사의 아픔이란게 이런 것이리라.

  1. 2010~11년까지 튀니지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을 튀니지의 국화에 빗대어 재스민혁명이라고 부른다. 이후 튀니지에서 시작된 민주화운동은 중동 및 북아프리카 지역의 민주화운동으로 확장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