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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예술산책

『십우도』의 관점으로 바라본 <쌍생아>

 『십우도』의 관점으로 바라본 <쌍생아>

 

  1. 序 

  『십우도』(十牛圖)는 깨달음(覺)에 이르는 과정을 10가지의 단계로 나누어 묘사한 작품으로, 『신심명』(信心銘), 『증도가』(證道歌), 『좌선의』(坐禪儀)와 함께 『선종사부록』(禪宗四部錄)에 수록되어 있다. 『선종사부록』(禪宗四部錄)에 실려 있는 『십우도』는 오조법연(五祖法演, ?~1104)의 3世에 해당하는 양산 곽암(廓庵)의 것으로[각주:1] 현존하는 곽암의 『십우도』는 그의 제자로 알려진 자원(慈遠)의 전체 서문(總序)과 각 단계별 서(序), 그리고 곽암에 의한 10개의 그림과 10개의 송(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에 석고이(石鼓夷) 및 괴납련(壞衲璉) 화상의 화송(和頌)이 덧붙여져 있다.[각주:2]
  이러한 십우도는 ‘참된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과정으로 상징화하였기에 ‘심우도’(尋牛圖)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 단계는 ① 심우(尋牛), ② 견적(見跡), ③ 견우(見牛), ④ 득우(得牛), ⑤ 목우(牧牛), ⑥ 기우귀가(騎牛歸家), ⑦ 망우존인(忘牛存人), ⑧ 인우구망(人牛俱忘), ⑨ 반본환원(返本還源), ⑩ 입전수수(入廛垂手)로 이루어져 있다.
  본고(本稿)는 이러한 십우도를 원용하여 츠카모토 신야의 1999년도 작품인 <쌍생아>(双生兒)를 해석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둔다. 이를 위해 십우도의 각 단계별 의미와 츠카모토 신야의 <쌍생아>를 함께 배치시킴으로써 <쌍생아> 속에 들어있는 십우도의 구조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쌍생아>의 주인공이 어떠한 단계를 거쳐 참된 자기와 마주하게 되는지 그 과정 또한 일별하게 될 것이다.

  2. 타자와의 합일을 통한 변신 : 츠카모토 신야(塚本晋也)

  TV시리즈 울트라Q(ウルトラQ)와 토호의 괴수영화에 영향을 받고 자란 츠카모토 신야는 14세부터 8mm 카메라를 가지고 영화를 찍기 시작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영상세계를 만들어왔다. 

  두 평 남짓한 아파트에서 엄청난 양의 폐품과 조명등 세 개를 사용하여 가내수공업 형태[각주:3]로 만든 <테츠오>(鐵男)가 1989년 로마 판타스틱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획득하였고, 3년 후에 찍은 <테츠오Ⅱ>(鐵男 Ⅱ)가 30개 이상의 해외영화제에서 상영되어 7개의 상을 받았다. 이어 신야는 1997년에 약관 37세의 나이로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을 맡게 된다.
  <테츠오>의 계보에 해당하는 츠카모토 신야의 영화에서는 금속으로 변신하는 주인공을 조소하고 증오하면서 모든 재난의 원인이 되는 적대자가 등장한다. 주인공과 적대자는 처절한 싸움을 마친 후 합체되어 세계를 붉게 녹슨 철부스러기의 세계로 바꿀 것을 결의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은 <도쿄 피스트>(東京フィスト)나 <쌍생아>(双生兒)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인공을 위협하고 지울 수 없는 굴욕을 주는 타자가 등장하고, 주인공의 정체성을 착란시킨 후 합체함으로써 이야기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영화평론가인 요모타 이누히코(四方田犬彦)는 이러한 츠카모토 신야의 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화작가로서의 츠카모토가 항상 추구하는 테마는 변신과 의식변화이다. 인간이 인간 이외의 것으로 그로테스크하게 변화하는 것에 대한 공포와 황홀이 그려진다. … 이처럼 츠카모토의 영화는 무엇보다도 뭔가 다른 존재로의 변화를 이루어내는 주체의 이야기이다.”[각주:4]

  짧게 끊어 리듬감을 주는 편집과 금속성, 차가운 음악, 만화에나 나올 것 같은 폭력 등 독특한 영상언어를 자신의 영화세계 안에 담아내고 있는 츠카모토 신야는 일본의 ‘데이빗 린치’, ‘사이버 펑크(Cyber Punk)의 전사’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그는 독립영화의 선구자답게 감독뿐만 아니라 촬영, 조명, 배우까지 겸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3. 참된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으로서의 영화 <쌍생아>

 1999년작 <쌍생아>는 츠카모토 신야의 이전 영화들과 세 가지 측면에서 차이가 난다. 먼저 메이저회사의 지원 아래 제작되었다는 것과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영화에 역사성을 부여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츠카모토는 사형수의 고백 형태를 취한 매우 짧은 에도가와 란포(江戸川乱歩)의 소설을 메이지 시대의 미감을 살린 시대극으로 그리면서도 그로테스크한 배경을 준비하여 거친 사이버 펑크스타일로 영화를 이끌어 감으로써 전혀 다른 분위기로 <쌍생아>를 연출하였다. 물론 <쌍생아>에서도 츠카모토는 연출, 각본, 촬영, 편집을 도맡아 1인 4역을 해 냈다.

  내용에 있어서 <쌍생아>는 츠카모토 신야의 이전 작품들의 맥을 이어 분신 간의 싸움이 반복된다. 하지만 <테츠오>와 <총알 발레>(Bullet Ballet)에서의 메탈릭한 배경은 모습을 감추고, 원색이 범람하는 빈민굴이 색채가 결핍되고 절제된 유키오의 저택과 대조적으로 등장한다. 카메라의 움직임에 있어서도 빈민굴은 핸드헬드를 통한 역동성이 중시된 반면, 유키오가 살고 있는 저택은 고정된 카메라를 통해 정적인 이미지가 부각된다. 음악 또한 유키오의 삶을 조명할 때에는 침묵이나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사용되었지만 스테키치의 삶이나 유키치의 삶에 스테키치의 흔적이 드리울 때에는 아이 우는 소리와 함께 웅장하면서도 메탈릭한 빠른 템포의 음악이 등장한다. 당시 츠카모토는 음악감독인 이시카와 츄(石川忠)에게 티벳풍의 음악을 주문했었다고 한다.
  이러한 <쌍생아>는 호러영화의 형태를 취하면서 인간 무의식 속의 본질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융(Carl Gustav Jung)의 심리학을 적용한다면, 억압적인 의식이 무의식의 파도에 휩쓸리면서 조금씩 자아를 회복해 가는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다.[각주:5]
  더불어 사회학적 입장에서는 공간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주변으로 배제되어 온 자들이 성과 폭력을 통해 전복을 감행한 기록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학적 관점을 일본이 처한 내적 상황에 대입시켜보면, 유키오는 일본의 보수 또는 우익의 이미지를 대변할 뿐만 아니라 세계경제대국으로서의 일본을 상징하기도 한다. 반면 스테키치는 일본의 발전 이면에 존재하는 외국인 노동자, 그리고 일본의 아픔과 약점을 상징하고 있다. 한편 링은 일본 내의 중간자적인 귀화인들 혹은 정치적으로 중도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츠카모토 신야의 <쌍생아>는 이와이 슌지(岩井俊二)의 1996년작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Swallowtail butterfly)와 비교해도 흥미로울 것이다.

  4. 십우도의 관점에서 해석된 <쌍생아> 
  여기서는 참된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을 10가지의 단계로 나누어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 십우도를 원용하여 츠카모토 신야의 영화, <쌍생아>를 분석하고자 한다.

  ① 심우(尋牛) : 소를 찾아 나서다.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가 더 이상 자신의 고향이 아니라는 낯설음의 자각, 나 자신이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낯익은 내가 사실 내가 아니라는 낯설음의 자각에서 목동은 이제 자기가 처해 있는 곳을 떠나 자기 자신과 세계를 찾아 길을 떠나게 된다.[각주:6]
  <쌍생아>는 20세기 초 러일전쟁에서 군의로 종군한 후, 고향에서 병원을 개업한 젊은 의사 유키오(모토키 마사히로)를 주인공으로 한다. 유키오는 장관을 살려 냈을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중상을 입은 많은 병사들을 구해내어 훈장까지 받은 덕망 있는 의사로 묘사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일상에 ‘묘한 기운’이 감돌면서 유키오는 ‘낯설음의 자각’을 하게 된다. 그는 가족과의 식사 때, 그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그런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듯한 ‘묘한 기운’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아버지에 의해 묵살 당한다.

  ② 견적(見跡) : 소의 자취를 발견하다.

  소를 찾아 나선 목동 앞에 소가 지나간 흔적들(traces)이 나타난다. 하지만 이제 겨우 소의 흔적인 발자국을 보았을 뿐이다. 게다가 그 발자국은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며, 천지사방으로 흩어져 있다. 발자국을 본 목동의 번민은 여기서 다시 시작된다. 소의 발자국은 소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의 발자국이라는 흔적에 소는 현전(現前)하면서도 동시에 부재(不在)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이제껏 유키오에게만 느껴졌던 그 ‘묘한 기운’이 집 안을 둘러싼 악취로 확장되어 현현함으로써 유키오와 가족들 모두가 그 ‘묘한 기운’에 둘러싸이게 된다. 묘한 기운의 흔적은 스테키치(모토키 마사히로)를 통해 구체화되면서 원인 모를 부모의 잇단 죽음으로 이어지지만 유키오는 아직 스테키치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한다. 유키오는 부모의 죽음 뒤에 존재하는 원인을 찾고자 집안 곳곳을 뒤적인다. 

  ③ 견우(見牛) : 소를 보다.

  불교에서 ‘견우’라 함은 목동이 자신의 몸으로 소를 실제로 보는 단계이자 소가 되는 단계이다. 이는 다음의 제4도 ‘득우’, 제5도 ‘목우’와 맥을 같이 한다. 왜냐하면 참 자기가 스스로를 노정하는 길에서 보는 것(見)과 되는 것(成)은 동일한 사건으로서 참 자기는 결국 자기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견성’(見性)과 ‘성불’(成佛)은 별개의 사건이 아닌 ‘견성’ 즉(卽) ‘성불’인 것이다.[각주:7] 하지만 제3도 ‘견우’에서 목동은 소의 전체를 바라보지는 못하고 있다. 이 단계에서 목동은 이제 막 사물의 근원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쌍생아>에서는 유키오가 부모의 잇단 죽음의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거울과 창문, 그리고 집 안에 있는 조그마한 우물을 통해 자신과 마주하는 모습이 묘사된다.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된 거울에서 관객들은 유키오의 일그러진 얼굴을 목도하게 된다. 유키오의 이러한 이미지는 이제껏 묘사되었던 유키오의 모습과는 상반된 이미지이다. 이를 통해 츠카모토는 유키오와 스테키치가 둘이 아님(不二)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유키오는 여전히 빈민굴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유키오에게 있어 빈민굴은 아직 동화될 수 없는 악의 근원이자 병균이 득실거리는 소굴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빈민굴에서 온 승려는 유키오에게 ‘호로자식’이라고 소리 지름으로써 유키오의 각성을 촉구하지만 유키오에게 있어 승려의 말은 한낱 '미친 소리'로 간주될 뿐이다. 이후 유키오는 빈민굴에서 온 자신의 동생인 스테키치와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유키오는 아직 스테키치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④ 득우(得牛) : 소를 붙잡다.

  드디어 목동이 소를 붙잡았다. 하지만 이제껏 익숙해져 있던 ‘대상적 세계’의 막강한 힘(고정관념) 때문에 소를 마음먹은 대로 부리기는 매우 힘들다. 목동은 자신의 통제를 벋어나 있는 소로 인해 당황하고 불안해하지만 자신에 대한 끈을 놓아 버릴 수도 없다. 그것은 잘라 버리려고 해도 나에게서 떨어질 수 없는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스테키치에 의해 - 자신의 집 정원에 있는 - 깊은 우물에 빠지게 된 유키오가 이제껏 자신이 느꼈던 ‘묘한 기운’의 대상이 스테키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유키오가 스테키치에게 ‘너는 누구냐’고 묻자 스테키치는 ‘나는 너’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유키오는 스테키치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더불어 스테키치가 던져주는 음식 또한 먹을 수 없다. 이제껏 그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에 있어 그것은 음식이 아닐 뿐만 아니라 유키오 자신은 스테키치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스테키치는 유키오로 완전히 변신하여 유키오의 모든 것을 소유해 나간다.

  ⑤ 목우(牧牛) : 소를 기르다.

  목동은 소에 이끌려서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마구 끌려 다니다가 그 모든 생각들이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난 것임을 아는 순간 더 이상 그 소에 끌려 다니지 않게 된다. 이때 소는 언제 그랬냐는 듯 더 이상 날뛰지 않는다. 이 단계의 핵심은 긴장과 대립이 해소된 조화로운 상태이다. 목동은 소의 코에 걸린 고삐를 손에 감아쥐고 유유히 집으로 향한다. 
  영화 <쌍생아>에서는 깊은 우물에 갇힌 유키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이 처한 상황에 차츰 순응해 가면서 스테키치가 던져주는 밥을 받아먹게 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아내인 링이 빈민굴 출신이라는 사실과 스테키치가 자신의 쌍둥이라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부모가 스테키치의 다리에 난 흉측한 반점 때문에 그를 강가에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괴로워한다. 급기야 유키오는 스테키치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하지만 스테키치는 생사(生死)의 문제를 유키오 자신이 직접 결정하라며 칼을 던져준다. 그 후 스테키치는 - ‘견우’의 단계에서 유키오가 그랬던 것과 같이 - 집 안의 조그마한 우물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데 이는 제3도 ‘견우’와 제4도 ‘득우’와 괘를 같이 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⑥ 기우귀가(騎牛歸家) :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

  제5도 ‘목우’에서의 조화로운 상태란 결국 서로 다른 두 개체의 존재를 전제한 것이다. ‘견우’와 ‘득우’, 그리고 ‘목우’를 거쳐 목동과 소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아직 이들 사이에는 여전히 거리가 존재한다. 하지만 제6도 ‘기우귀가’에서는 목동이 소의 등 위에 올라 타 있다.(騎牛) 이제 소는 목동의 피리 소리에 따라 스스로 자기가 살던 집으로 되돌아간다.(歸家) 여기서 ‘귀가’란 ‘참된 자기’로 깨어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목동과 소의 - 조화를 넘어 - 일치(unity)를 언급한 것이다.
  그 옛날 당나라 고승이었던 임제(臨濟) 의현(義玄)은 참된 자기를 찾기 위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殺佛殺組)고 가르쳤다.[각주:8] <쌍생아>에서는 이제껏 두 주체로 분리되어 있던 유키오와 스테키치가 우물에서 빠져나온 유키오에 의해 스테키치가 죽임을 당함으로써 하나가 되는 장면으로 묘사된다.  

  ⑦ 망우존인(忘牛存人) : 소는 잊고 사람만이 남다.

  그런데 목동이 소를 찾아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소는 온데간데없이 다시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목동은 소를 찾아 나설 생각도 하지 않고 한가하게 홀로 앉아 있다. 그러고 보니 소는 목동을 집으로 데려다주기 위한 방편(方便)이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집을 나갔던 것도 소가 아니라 목동 자신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소는 사라져 버렸을지라도 그 사라진 소를 생각하는 목동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목동은 소를 찾아 그 소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자신이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목동은 아직도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완전한 탈각(脫却)을 하지 못한 것이다. 목동에게는 최후의 한 발자국이 더 필요하다.(百尺竿頭進一步)
  <쌍생아>에서는 스테키치를 목 졸라 죽인 유키오가 스테키치를 죽였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리며 링을 찾아가는 장면으로 묘사된다.

  ⑧ 인우구망(人牛俱忘) : 사람과 소를 모두 잊다.

  이제는 한가하게 앉아 있던 목동까지 사라져 버리고 하나의 커다란 원만이 남아 있다. 주체와 객체, 나와 세계의 모든 대립은 자취를 남기지 않고 해체되어 버린 것이다.[각주:9] 절대무(絶對無)의 현현이다. 대승불교의 공(空)사상을 체계화한 용수(龍樹)의 중관(中觀)철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절대란 현상적인 세계와 병렬적으로 놓여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현상의 실재를 뜻한다. 만일 부정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착각에 대한 부정이지, 실재에 대한 포기나 축소가 아니다.
  다시 말해 용수에게 있어 속세(俗世)는 열반(涅槃)에 이르는 과정이 아니라 열반이 곧 속세이고, 속세가 곧 열반인 것이다.(涅槃卽生死, 生死卽涅槃)[각주:10] [각주:11] 여기서 우리는 모든 것이 텅 빈 원 또한 최후의 장소가 아님을 알게 된다.
  <쌍생아>에서 츠카모토 신야는 제8도 ‘인우구망’의 단계를 유키오와 스테키치가 태어나는 순간과 스테키치가 강가에 버려지는 과정으로 되돌려 묘사하고 있다.  

  ⑨ 반본환원(返本還源) : 본원으로 돌아가다.

  모든 것이 공(空)으로 돌아갔다고 해서 그 공(空)이 궁극의 것이 될 수는 없다. 일(一)은 그 일(一)에 대한 여하한 집착과 대상화도 거부함으로써만 일(一)이 되는 것이다. 공(空) 역시도 근본이 될 수 없는 까닭은 공(空) 그 자체가 탈공(脫空)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우구망’이 근본이 아니라 거기에서 나와야 할 근원은 ‘인우구망’의 차원까지도 뛰어넘어야 한다. 그렇기에 제9도 ‘반본환원’에서는 절대부정이 절대긍정으로 살아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곽암은 송(頌)에서 “물은 절로 아득하고 꽃은 절로 붉다.”(水自茫茫花自紅)고 언급한다.
  <쌍생아>에서는 유키오가 스테키치를 죽인 후 예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전에 나타났던 반목과 갈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유키오는 왕진을 나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한편 그의 아내 링은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제야 주인공 유키오가 운영하는 병원이름(大德寺醫院)이 화면에 클로즈업된다.[각주:12] 이를 통해 츠카모토는 이후 유키오의 행보에 대해 암시하고 있다.

  ⑩ 입전수수(入廛垂手) : 저자에 들어가 손을 드리우다.

  웬 늙은 노인이 가슴을 풀어헤치고 맨발로 저자에 들어와서는 웃는 얼굴로 소년에게 다정스럽게 인사말을 던진다. “그대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오는 길인가?”, “지금 어디로 가는가?”
  그런데 이 노인의 평범한 인사말은 우레와 같은 큰소리가 되어 소년의 잠자는 마음을 깨우고, 결국 소년은 낯설어진 자기 자신을 찾는 구도의 길로 떠나게 된다. 그래서 제10도 ‘입전수수’는 완성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다. 깨달음과 자비는 십우도의 귀결이자 그 출발인 것이다.
  <쌍생아>에서는 왕진을 나가던 유키오가 병원 앞에서 또다시 빈민굴의 승려와 마주친다. 승려는 예전과 같이 유키오를 ‘호로자식’이라고 욕하려 하지만 승려는 유키오가 과거의 유키오가 아님을 즉시 간파한다. 저잣거리로 왕진을 나간 유키오는 거리에서 빈민굴 소년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지금의 유키오에게 있어 빈민굴은 더 이상 악의 근원도 아니요, 병균의 소굴도 아니다. 유키오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 소년과 함께 빈민굴로 왕진을 나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5. 結
  츠카모토 신야의 <쌍생아>를 곽암의 십우도(十牛圖)를 원용하여 해석해 보았다. 물론 <쌍생아>는 - 이전의 츠카모토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 영화 속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인 유키오와 스테키치가 반목과 갈등을 통해 합일을 이룬 후 새롭게 변화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때 <쌍생아>에서 그 척도로 나타난 것이 바로 절대 타자로서의 빈민굴에 대한 주체의 수용여부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빈민굴과 유키오의 삶을 대립시키기 위해 병원과 저택을 지배하고 있는 청결공포증을 내세운다. 유키오와 그의 부모는 자신들의 마을 바깥에 위치한 빈민굴로부터 전염병 세균이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편견은 제3도 ‘견우’에서 주인공 유키오와 그의 아내 링과의 대화에서 잘 나타난다. 이때 유키오는 - 아버지의 말을 빌려 - 빈민굴이 악의 근원이자 병균의 소굴임을 언급하면서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빈민굴을 통째로 불태워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키오의 분리된 시각은 십우도의 각 단계들을 거치면서 서서히 달라진다. 특히 제4도 ‘득우’에서는 이전까지 영화의 주체였던 유키오 외에 또 다른 주체로서 스테키치가 화면에 적극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곧 상호주체(intersubjectivity)의 존재로서 유키오와 스테키치의 상호인과(mutual intercausality)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물론 유키오는 이러한 변화의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제6도 ‘기우귀가’의 단계에 접어들면 두 주체는 스테키치의 죽음을 통해 해체와 합일의 과정을 이루게 되고, 본래면목(本來面目)과 맞닥트린 유키오는 이제 번뇌(煩惱)와 열반(涅槃), 생(生)과 사(死)의 경계넘기(transgression)를 통해 -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견지에서 - 빈민굴로 찾아가 보살도를 행하게 된다. 이러한 유키오의 거침없는 행동은 바로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으면서도 사랑과 자비의 정신을 발휘하는” 진정한 자유인으로서의 참자유의 실현인 것이다.[각주:13]

 졸고, "『십우도』의 관점으로 바라본 <쌍생아>", 『영화』4권1호, (부산대학교영화연구소, 2011)를 수정한 글임.

  1. 운문종(雲門宗)에 속한 보명(普明)의 작품도 있다. 보명의 십우도는 『목우도』라고 불리는데, 그 단계는 ① 미목(未牧), ② 초조(初遭), ③ 수제(授制), ④ 회수(廻首), ⑤ 순복(馴伏), ⑥ 무애(無碍), ⑦ 임운(任運), ⑧ 상망(相忘), ⑨ 독조(獨照), ⑩ 쌍민(雙泯)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명의 목우도는 원이 아닌 사각(四角) 안에서 처음부터 소와 사람이 함께 등장하여 그려지다가 소와 사람이 무심경(無心境)에 이르는 ‘상망’이 있은 후 최종 제10도에 이르러서는 소도 사람도 모두 자취를 감추고 원만이 남아 있는 ‘쌍민’의 단계로 나아간다. 수행(修行)을 중시하였던 보명은 그의 목우도에서 - 곽암의 십우도와는 달리 - 수행의 단계를 직선적 상승으로 파악하고 있다. 최광현, “修行門에서 본 一圓相”, 『원불교사상』제26집, (익산: 원광대학교원불교사상연구원, 2002), 42~45 참조. [본문으로]
  2. 화두(話頭)를 참구하여 단박에 깨치는 즉심즉불(卽心卽佛), 즉 돈오(頓悟)의 배경을 지닌 곽암의 십우도는 임제종(臨濟宗)의 선지에 의한 목우(牧牛)사상에 기반하고 있다. 한기두, “牧牛圖 에 관한 연구, 牧牛의 思想”, 『이기영박사고희기념논총』, (서울: 한국불교연구원, 1984), 325. [본문으로]
  3. 감독, 각본, 출연, 촬영, 조명, 편집, 특수촬영, 미술 등 이 모든 것을 츠카모토 신야 자신이 직접 담당하였다. [본문으로]
  4. 요모타 이누히코, 『일본영화의 래디컬한 의지』, (서울: 소명출판, 2011), 141~142. [본문으로]
  5. C. G. 융, 권오석 譯, 『무의식의 분석』, (서울: 홍신문화사, 2007) 참조. [본문으로]
  6. 곽암에게 있어 ‘심우’(尋牛)라는 구도의 시작은 ‘심우’를 등지고 있음을 홀연히 깨달아 ‘심우’ 본래의 자리로 환원(還源)하려는 ‘초발심’(初發心)을 뜻한다. 강문선, “廓庵의 『十牛圖』에 나타난 선사상”, 『한국불교학』제26권, (서울: 한국불교학회, 2000), 320. [본문으로]
  7. 見性成佛은 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과 더불어 선(禪)불교의 핵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본문으로]
  8. 臨濟錄, 14-17. 道流야 儞欲得如法見解인댄 但莫受人惑하고 向裏向外하야 逢著便殺하라. 逢佛殺佛하며 逢祖殺祖하며 逢羅漢殺羅漢하며 逢父母殺父母하며 逢親眷殺親眷하야사 始得解脫하야 不與物拘하고 透脫自在니라. [본문으로]
  9. 주체와 객체는 상대적 개념이다. 주체가 주체인 것은 객체에 의해서이고, 객체는 주체와 상대해서만 객체일 수 있다. 따라서 객체가 사라진 곳에 주체가 존재할 수 없다. 소의 사라짐은 필연적으로 목동의 사라짐을 동반하는 것이다. 정호영, “확암(廓庵) 「십우도」의 사상”, 『인문학지』제32집, (청주: 충북대학교인문학연구소, 2006), 19. [본문으로]
  10. 『中論』, 16-10. 不離於生死 而別有涅槃 實相義如是 云何有分別, 25-19. 涅槃與世間 無有少分別 世間與涅槃 亦無少分別, 25-20. 涅槃之實際 及與世間際 如是二際者 無毫釐差別 [본문으로]
  11. 공(空)이 긍정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부정이 철저하기 때문이며, 일체가 예외 없이 모두 부정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부정은 긍정에 대립되는 한에 있어서만 부정이다. 그러나 일체가 모두 부정되어 긍정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경우에는 부정이 부정의 의미를 잃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공(空)에 있어서의 긍정의 의미이다. 공(空)은 일체를 모두 부정함으로써 일체를 모두 긍정한다. 이때의 긍정을 부정과 긍정의 대립을 넘어선 ‘절대긍정’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야지마 요우기찌, 송인숙 譯, 『공(空)의 철학』, (서울: 대원정사, 1992), 225, 251. [본문으로]
  12. 물론 앞서 빈민굴 출신 스님과의 대화 속에서도, 스테키치가 임시휴업을 공지하는 장면에서도 병원이름이 살짝 배경화면으로 잡히기는 하지만 제9도 “반본환원”에 이르러서야 병원이름이 화면에 클로즈업되어 관객에게 각인된다. [본문으로]
  13. 『金剛經』 10. 應無所住而生基心(응당 어디에도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여기서 주(住)란 사물에 마음을 멈추어서 집착한다는 의미로서 정체, 고립, 사로잡힘 등의 의미이다. 따라서 무주(無住)란 집착심이 없음을 뜻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