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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예술산책

작품분석 -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

비인간적인 인간과 인간적인 복제인간 -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중심으로
1. 序 : <블레이드 러너>가 등장하기까지


   SF영화(공상과학영화 / Science-Fiction Film)는 비평가들에 의해 다양하게 정의되어 왔지만 과학을 근간으로 SF의 성립이 가능하다는 전제하에서 볼 때, SF영화란 “과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미래사회의 모습을 그려낸 영화”라고 일컬을 수 있다. 하지만 SF영화가 그려내는 미래의 사회라는 것도 결국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 사회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에 미래 사회에 대한 전망이 어떠하냐에 따라 현 사회를 바라보는 SF영화의 시각이 나타난다. 그렇기에 많은 SF영화들은 보수와 진보를 불문하고 당대 사회에 대한 은유로 읽힐 수 있다는 점에서 SF영화는 우회적으로 역사를 다루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이러한 SF영화의 효시는 1902년, 조르쥬 멜리에스(Georges Melies)의 <달나라 여행>(A trip to the moon)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초기 대표적 SF영화로는 - 리들리 스콧(Ridley Scott)이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 1982)를 통해 오마쥬를 바친 - 프리츠 랑(Fritz Lang)의 1927년작, <메트로폴리스>(Metropolis)가 있다. 랑의 <메트로폴리스>는 프랑수아 트뤼포(Francois Truffaut)의 <화씨 451>(Fahrenheit 451 / 1966),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y Tarkovskiy)의 <솔라리스>(Solaris / 1972) 등 이후 등장하는 SF영화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각주:1]

  한편 미국 할리우드의 경우, 미국과 소련의 냉전대립 체제가 우주개척프로젝트와 연결되던 1950년대 들어 본격적인 SF장르의 틀을 갖추게 된다. 당시 할리우드 SF영화는 인간세계를 위협하는 외계인을 통해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함으로써 냉전에 의해 야기된 두려움을 주로 다루었다.[각주:2] 이후 1960년대 들어 소련의 무인 인공위성인 루나(Luna) 9호가 최초로 달 표면에 연착륙하고(1966년) 미국의 유인우주선인 아폴로(Apollo) 11호가 1969년에 달 착륙에 성공하게 되면서 1960년대 할리우드 SF영화는 우주 개척자의 면모를 갖추게 되는데, 이 때 등장하는 영화가 바로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2001: A Space Odyssey / 1968)이다.

  그 후 할리우드 SF영화는, 1970년대 후반 들어, 발달된 영화기술을 본격적으로 도입하면서 중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의 <미지와의 조우>(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 / 1977)와 조지 루카스(George Lucas)의 <스타워즈>(Star Wars / 1977), 그리고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Alien / 1979) 등이 그 당시 대표적인 영화들이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SF영화의 중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또 하나의 작품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1982년작, <E.T.>였다. <E.T.>는 1993년 스필버그의 또 다른 작품인 <쥬라기공원>(Jurassic Park)이 등장할 때까지 역대 최고의 흥행작으로 군림하면서 우호적 외계인의 등장이라는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내게 된다.[각주:3] 불행하게도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는 당대 최고의 흥행작인 <E.T.>와 같은 주에 개봉되었다. 모두가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당시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흥행의 측면에서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은 <블레이드 러너>를 통해 자신이 살고 있던 1980년대라는 현실을 2019년 11월, 로스앤젤레스라는 특정 시공간에 접목하여 기술문명의 어두운 측면을 묵시론적으로 표현함으로써 SF영화를 시대정신을 내포한 영화장르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여러 개의 버전들이 존재하지만 개봉당시의 극장판(1982)과 1992년 감독판(Director's Cut)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본고(本稿)는 감독의 의도가 좀 더 묻어나는 감독판을 중심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2. 원작과의 관계성


   1982년 개봉된 <블레이드 러너>는 필립 K. 딕(Philip K. Dick)의 소설 『안드로이드들은 전기양을 꿈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 1968)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하드보일드(hard-boiled)한 문체와 느와르(Noir) 영화의 영향, 그리고 1960년대에 나타난 뉴웨이브(New Wave) 문학의 특징을 담고 있는 딕의 『안드로이드들은 전기양을 꿈꾸는가?』는 2021년 샌프란시스코라는 시공간 속에서 - 핵전쟁 이후 파괴되고 황폐해진 지구를 배경으로 - 주인공 데커드(Deckard)가 인간과 섞여 살고 있는 안드로이드(Android)를 추적해 퇴출시키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딕은 그의 소설에서 “인간과 외관상 구별되지 않는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라는 인간 존재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를 제기하지만 딕은 처음부터 인간이 다른 생물체나 기계와는 달리 감성과 공감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기에 소설 속에 등장하는 데커드는 - 감정이 없는 안드로이드와는 달리 - 안드로이드를 죽여야 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갈등한다. 

  하지만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 등장하는 데커드는 복제인간인 리플리칸트(replicant)를 죽이는 것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오히려 데커드는 여성 리플리칸트인 조라(Zhora)를 등 뒤에서 총으로 쏘는 잔인하고도 무정한 존재이다. 이때 감독은 관객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조라가 데커드의 총에 맞아 넘어지는 모습을 슬로우 모션으로 재현해 낸다. 뿐만 아니라 조라가 입고 있는 투명한 비닐 외투는 그녀의 핏자국을 더욱 선명하게 해 줌으로써 관객들에게 복제인간이 아닌 붉은 피가 흐르는 생명체라는 점을 주목하게 한다. 이는 데커드가 또 다른 리플리칸트인 프리스(Pris)를 죽일 때도 마찬가지이다. 데커드의 총에 맞아 죽어가는 프리스를 잡아내는 카메라의 시선은 퍼덕이며 꺼져가는 생명체의 가련함과 처참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결국 데커드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단면이기도 하다.

  반면 리플리칸트들은 소설과 달리 감정을 가진 존재로 묘사된다. 자신의 기억이 이식된 것임을 알게 된 후 눈물 흘리는 레이첼(Rachael)이라든지, 자신의 연인인 프리스가 데커드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프리스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눈물 흘리는 로이 배티(Roy Batty) 등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특히 리플리칸트인 로이는 자신의 연인을 죽인 데커드가 지붕에 매달려 죽음에 이르렀을 때 오히려 그를 구해주게 되는데, 이 때, 리들리 스콧은 복제인간인 로이의 존재를 인간을 넘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이미지와 오버랩 시켜 냄으로써[각주:4] 데커드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던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로이의 시선에 동화되어 리플리칸트에게서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모습을 느끼게 만든다.[각주:5]

  물론 소설과 마찬가지로 인간과 리플리칸트를 구분하고 그들을 회수(retirement)하는 것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주요한 구도이지만 감독은 딕의 소설에서 강조되었던 인간만이 유일하게 감정을 가진다는 전제를 제거함으로써 복제인간인 리플리칸트와 인간의 차이를 모호하게 만든다.[각주:6] 그리고 이러한 경계의 모호성은 영화에 긴장감을 제공해 준다. 하지만 감독은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복제인간인 리플리칸트를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으로 묘사해 냄으로써[각주:7] 후기 자본주의 사회로 지칭되는 현대사회가 지닌 자기모순, 즉 문명의 발달과 함께 비인간화 되어가는 인간의 자기 파멸이라는 인식에 기초하여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3. 후기 자본주의 도시의 이미지


   SF영화는 장르적 특성상 내러티브 구조보다 시각적 효과를 통해 미래사회의 모습을 조망하게 된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도입부 또한 이러한 SF영화의 장르적 특성을 잘 표현해 내고 있다.

  먼저 영화의 시작과 함께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자막이 깔린 후, 카메라는 익스트림 롱 샷(extreme long shot, ELS)을 통해 도시의 전경을 비춘다. 곳곳에서 솟아오르는 불기둥, 점점이 빛나는 불빛, 희뿌연 스모그를 뚫고 하늘을 나는 비행선 등, 이 모든 것들은 두 개의 우뚝 솟은 건물을 중심으로 질서 지어져 있다. 여기서 감독은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 이 두 건물을 멕시코 테오티와칸(Teotihuacan)의 - 해와 달을 상징하는 - 두 개의 피라미드(Pyramid)로 형상화함으로써 타이렐 기업(Tyrell Corporation)의 절대 권력을 표현해 낸다. 빌딩의 표면은 거대한 컴퓨터칩처럼 보이는 것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데 이는 기술지상주의의 상징이기도 하다.

  영화는 블레이드 러너인 홀든(Holden)이 레온(Leon)을 상대로 복제인간인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보이트-캄프(Voight-Kampff) 테스트 씬으로 이어진 후, 다시 도시의 내부로 시선을 옮긴다. 거대한 마천루(摩天樓)로 가득 찬 도시 중심부의 모습과 함께 아직도 지구에 남아 있는 이들을 향해 우주 개척지로의 이주를 권하는 광고선이 거대하게 치솟은 빌딩숲 사이로 운항하고, 우뚝 솟은 네온 광고판에서는 게이샤가 교태를 부리며 상품을 광고하고 있다.

  카메라는 더욱 아래로 내려가 지상을 스캔한다. 햇빛이 사라진 도시는 마치 탈출구가 없는 칙칙하고 음울한 이미지로 비춰진다. 항상 어둡고 지저분한 거리에는 - 마치 도시를 버리고 교외로 나간 백인의 탈출현상 후, 도시는 유색인종을 중심으로 한 하층민의 게토(ghetto)가 된 듯 - 동양인들이 두드러지게 많이 눈에 띈다. 이들은 모두 우주 개척지로 갈 자격이 없는 하층계급으로, 나무 한그루 없는 거리에서 하늘을 나는 경찰차의 감시 아래 산성비를 피해가며 무표정하게 활보하고 있다. 길거리 곳곳에는 한자와 일어가 눈에 많이 띄고, 사용되는 언어 또한 여러 언어가 혼합되어져 나타난다. 

  영화 속 2019년의 로스앤젤레스는 복제인간을 만들어 파는 타이렐 기업이 국가권력을 대신하여 지배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심어준다. 감독은 타이렐 기업의 회장인 타이렐을 신(神)으로 상징화하기 위해 그의 침실을 - 촛불 등과 같은 미장센(mise-en-scene)을 통해 - 성당과 같은 분위기로 묘사해 낸다. 하지만 타이렐 회장의 집무실을 제외하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연 조명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전체적으로 어둡고 음침한 로우키(low-key) 조명을 통해 침울한 미래사회를 표현해 내고 있다.(느와르 영화 조명기법) 이는 곧 자연, 희망, 햇빛 등의 긍정적 개념이 인공, 불안, 어두움 등에 철저히 가리어져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리들리 스콧은 그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통해 그리 멀지 않은 2019년 11월이라는 특정 시점과 로스앤젤레스라는 특정 공간에다가 1980년대 감독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각주:8]를 접목시켜, 거대한 소비문화가 휩쓸고 간 뒤의 지구의 모습을 지옥도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아름다운 자연과 인간성을 담보로 얻은 극단적인 산업화와 기술문명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4. 신(神)을 넘본 인간의 파멸


  인간의 오만이 영화 속 미래사회의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는 메리 셸리(Mary Shelley)의 소설,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메리 셸리의 소설에 나오는 빅터 프랑켄슈타인(Victor Frankenstein)은 오로지 과학의 힘만으로 ‘생명’을 탄생시키고자 하는 과학자이다. 물론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이러한 연구는 신과 같은 전능한 힘으로 여성을 통하지 않고 인간을 직접 창조하기를 바라는 인간의 오만에서 비롯된다. 남성이 여성을 배제하고 생명을 창조한다는 것은 신이 창조한 자연의 기본법칙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그 결과는 당연히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주시할 점 또한 타이렐 회장으로부터 그 휘하의 유전자 설계사 세바스찬(J. F. Sebastian), 안구제조자 츄(Chew)에 이르기까지 리플리칸트를 창조한 그들 모두가 남성이라는 것이다. 이는 <블레이드 러너>가 『프랑켄슈타인』과 연장선상에 놓여 있음에 대한 반증으로, 영화 속 타이렐 회장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연결되고 리플리칸트인 로이는 인간과 섞이기를 원하지만 거부당하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창조물과 동일시될 수 있다. 그래서 리들리 스콧은 자신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통해 재생산의 기능을 잃어버린 지구를 그 결과물로 그려냄으로써 과학만이 인간의 삶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근대적 믿음’을 해체시킨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신에게 대항하여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More human than human) 복제인간을 창조하고자 하였던 그들의 첨단 과학기술이란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의 질병조차 치료하지 못하는 절름발이 과학기술이라는 사실로 인해 더욱 확고해진다.[각주:9] 여기서 리들리 스콧은 - 유전자 설계사라는 첨단직업을 가진 25세의 - 세바스찬이 걸린 조로증(Progeria, 早老症)을 통해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가속화된 노쇠’(Accelerated decrepitude)[각주:10] 현상의 한 단면을 그려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족 없이 큰 건물에 혼자 살면서 장난감을 만들어 그들과 ‘소통’하며 살고 있는 세바스찬의 일상을 통해 가족공동체가 파괴된 미래 사회의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영화 속 인물들은 대부분 원 쇼트(one shot)로 포착되어지는데 이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인간 존재의 고립감, 불안정 등을 표현해 내기 위해서이다. 반면 복제인간인 리플리칸트들은 투 쇼트(two shot) 이상으로 잡아냄으로써 소외된 인간들의 모습과는 달리 상대적 친밀성과 유대감을 부각시켜 낸다. 흥미로운 것은 데커트와 레이첼을 향한 카메라의 시선이다. 타이렐 회장 집무실에서 처음 만나 이뤄진 테스트에서 데커트와 레이첼은 나눠찍기를 통해 각각 원 쇼트로 비춰지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그들은 같은 쇼트 안에 있는 경우가 많아지고, 탈출을 위해 데커드의 아파트에 머무를 때 그들은 항상 투 쇼트로 촬영되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쇼트 내에서는 끊임없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핸드헬드(Hand-Held)를 통해 카메라가 움직이거나 아니면 등장인물이 움직이거나 심지어 카메라나 등장인물이 움직이지 않을 경우에는 서치라이트를 사용함으로써 화면에 움직임을 준다. 이러한 카메라의 시선 또한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미장센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결국 <블레이드 러너>에서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인간의 오만에 기인하여 인간의 삶의 터전인 지구를 황폐화시키면 결국 인간의 세계 또한 황폐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5. 죽음을 향한 존재의 실존론적 자기이해


  하이데거(M. Heidegger)에게 있어 철학의 근본과제는 어디까지나 존재에 대한 물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의 개념은 모든 개념 가운데서 가장 높고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므로, 이를 묻기 위해 하이데거는 존재이해의 방법적 통로로서 현존재(Dasein)를 언급한다.[각주:11] 다시 말해 하이데거는 현존재라는 존재자를 사유함으로써 존재자체가 어떻게 파악될 수 있는가를 문제 삼은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러한 현존재는 시간과 세계 속에 일정한 방식으로 던져져 있다는 의미에서 과거의 조건에 의해 제약되어 있으며, 동시에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을 파악하려고 다가오지 않은 시간 속으로 뛰어든다는 의미에서 미래를 지향한다. 소광희는 그의 책,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강의』에서 현존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존재는 이 세상에 (내던져지듯이) 태어나서 이렇게 현사실적으로 살면서 자기를 가능성을 향해 기투하는 자이다."[각주:12]

  조금 더 부연하자면, 현존재는 세계를 파악하기에 앞서 이미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 던져져 있기에 그 속에서 사물들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즉 현존재는 던져진 존재(피투성, thrownness)이자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현존재는 실존 속에 던져져 있다”라고 말한다.[각주:13] 이 말은 곧 인간 실존의 역사성과 유한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현존재는 과거의 규정 속에 머물러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직접 기투(Projection)하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현존재는 가능성을 향해 기투한다는 점에서 존재가능(potentiality-for-Being)이며 가능존재(Being-possible)이다.[각주:14] 이처럼 과거성의 계기로서의 ‘전승의 피투성’과 미래성의 계기로서의 ‘이해의 기투’를 하나의 통일된 현상으로 기술하면서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실존론적 구조의 근거를 시간에서 찾는다.[각주:15]

  하이데거에게 있어 ‘시간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즉 죽음을 향한 존재(Being-towards-the-end)라는 뜻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시간의 제약 속에서 모든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언젠가는 반드시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물학적 죽음은 인간이 피하려고 해도 반드시 직면할 수밖에 없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 앞에 불안의 심연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실존으로서 인간 현존재를 이해하려고 하였던 하이데거는 언젠가 다가올 생물학적 죽음이 인간 현존재에게 어떠한 의미로 새겨질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이해를 통해 어떻게 본래적인 자기를 발견할 수 있는지를 분석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가 시간의 한계 속에서 과거를 떠맡고 죽음을 향해 미리 앞서 달려가 죽음과 맞닥트림으로서(선구적 결의성, anticipatory resoluteness) 죽음에 대한 온갖 집착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존재가 죽음을 향해 앞서 달려가 죽음으로 하여금 자신 안에서 위력을 가지도록 할 때, 현존재는 죽음에 대해 자유로우면서 자신의 유한한 자유가 가진 독자적인 강력함(superior power) 속에서 자신을 이해한다. … 이 유한한 자유 안에서 현존재는 자기가 자신에게 내맡겨져 있다는 무력함(powerlessness)을 인수하게 되고, 개시되어 있는 상황의 우연들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된다.”[각주:16]

  <블레이드 러너>의 내러티브 구조는 쫓고 쫓기는 전형적인 액션 스릴러이다. 그렇기에 영화 속 주인공인 데커드의 주요임무는 금기를 깨고 지구로 잠입한 리플리칸트들을 찾아 그들을 회수(retirement)하는 것이다. 하지만 복제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시시각각으로 자신을 죽이기 위해 쫓아오는 블레이드 러너라는 존재와 그들 자신에게 주어진 4년이라는 짧은 ‘생물학적 수명’은 항상 그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이러한 설정은 피투된 존재로서의 인간의 유한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리플리칸트가 피하고자 애쓰는 ‘죽음’은 곧 인간의 궁극적인 운명인 죽음과 연결된다.

  물론 영화 속 리플리칸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금기를 깨고 지구로 돌아와 자신들의 창조주를 만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타이렐 회장은 과거와 미래의 부재로 인해 현존을 의심해야 하는 리플리칸트들의 존재론적 위기에 대해 어떠한 인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처음부터 리플리칸트들의 수명을 4년으로 설계하여 그들이 감정을 가지고 사회화되는 것, 즉 아버지의 법칙이 지배하는 상징계로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였었다. 결국 리플리칸트인 로이가 자신의 창조주인 타이렐 회장을 만나 확인한 것은 죽음의 필연성, 즉 ‘피할 수 없음’에 대한 사실 확인이다. 여기서 로이는 타이렐 회장의 죽음이라는 ‘통과 의례’를 통해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운명을 생물학적 죽음을 넘어 실존론적 죽음으로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이때부터 로이는 이전까지 생물학적인 죽음에 쫓기고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블레이드 러너에게 쫓겨 다녔던 것과는 달리, 자신을 추적하던 데커드를 뒤쫓게 된다. 이는 타이렐 회장을 죽이고 필연적인 죽음을 스스로 인수함으로써 자유로워진 로이의 능동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로이에게 쫓겨 죽음 앞에 내몰린 데커드는 오히려 로이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되지만 로이는 죽음의 낭떠러지에 매달린 데커드를 구하고 죽음을 맞이하는데서 영화는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후 영화는 로이에 의해 눈을 뜨게 된 데커드가 자신의 연인인 레이첼과 함께 새로운 탈출구를 찾아 떠남으로서 막을 내린다.

6. 結 : 영화의 주요 모티브인 눈과 기억


  영화의 시작과 함께 감독은 익스트림 롱 샷을 통해 2019년, 로스앤젤레스의 도시 전경을 비춤과 동시에 인간의 눈을 익스트림 클로즈업(exteme cIose-up, ECU)시켜 도시 전경과 교차편집하여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영화의 중심 내러티브는 금기를 깨고 지구로 잠입한 리플리칸트들을 제거한다는 것인데, 이때 리플리칸트인지의 여부를 구별하는 방법이 보이트-캄프 테스트를 통한 눈의 변화를 쫓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리플리칸트인 레옹이 데커드를 죽이려 할 때도 데커드의 눈을 찌르려고 하였고, 로이 또한 타이렐 회장을 죽일 때 그의 눈을 찔러 죽인다. 이러한 눈의 강조는 역설적으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음”(the failures of seeing)을 부각시켜 내는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다.[각주:17] 타이렐 회장의 두터운 안경이 바로 이러한 맹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옛날, 성서의 기자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했다면, 리들리 스콧은 <블레이드 러너>에서 눈을 강조함으로써 “눈 있는 자는 똑바로 보아라”고 관객들에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영화 속 인간과 리플리칸트를 구별하는 결정적 근거는 다름 아닌 ‘기억’이다. 리플리칸트들은 그들에게 주입된 ‘파편화된 기억’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복제인간인지의 여부는 기억에 대한 질문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리플리칸트인 레온에게 던져진 질문이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었고, 조라에게 던져진 질문 또한 업주가 나쁜 짓을 한 적이 있느냐는 기억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렇게 기억이 리플리컨트와 인간을 분별하는 기준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성의 중심에 기억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경험론자였던 존 로크(John Locke)가 그의 인식론에서 언급하였듯, 경험이 인간을 구성하고 개인의 정체성은 경험에 의한 기억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롭게 발명된 레이첼의 경우, 인간과 비교할 때, 이식을 통해 나름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나타나는 인간과 복제인간의 차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삶을 통해 경험된 기억인가 아니면 그것과 무관하게 이식된 경험인가 하는 ‘기억의 기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진경은 그의 책,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대한 7편의 영화』에서 - 라캉(J. Lacan)과 알튀세르(L. Althusser)를 인용하면서 - 기억의 효과가 동일하다면 기억의 기원이 다르다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반문한다.[각주:18] 앨리슨 랜즈버그(Alison Landsberg) 또한 레이첼의 피아노 연주를 예로 들며, 피아노를 배웠던 레이첼의 기억이 이식된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판단하기 이전에 그녀가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현재의 결과에 주목한다.[각주:19]

  결국 리들리 스콧은, 영화의 원작인 필립 K.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들은 전기양을 꿈꾸는가?』와는 달리, 리플리칸트와 인간의 차이를 처음부터 모호하게 설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복제인간을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 표현해 냄으로써 자연의 기억을 거세당한 인간들이 오히려 리플리칸트가 아닌지 관객들에게 반문하고 있다.

  이와 함께 감독은 인간의 삶의 터전인 지구를 담보로 얻은 극단적인 산업화와 기술문명의 발달이 결국 인간의 자기 파멸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면서, 미래로의 실존론적 기투(Existential Projection)를 통해 지금의 현실을 바로잡아 나가지 않는다면 <블레이드 러너>에서 그려진 암울한 ‘현실’은 곧 다가올 우리의 현실이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리들리 스콧은 말한다. “눈 있는 자는 볼지어다.”

  졸고, "비인간적인 인간과 인간적인 복제인간 -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중심으로", 『영화』4권2호, (부산대학교영화연구소, 2012) 133~53쪽을 살짝 수정한 글임.

  1. 하지만 SF장르는 웨스턴장르와 함께 할리우드가 독점해 온 장르이다. 물론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의 <알파빌>(Alphaville / 1965)이나 프랑수아 트뤼포의 <화씨 451>(1966)과 같은 누벨바그 영화작가들의 SF물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1972)와 같은 작품들도 SF영화에 속하지만 이들은 장르시스템보다는 작가주의적 계보에서 활동한 감독들의 영화들이다. 따라서 영화산업 시스템 속에서의 지속성과 양적인 토대에서 볼 때 할리우드 장르로서의 SF와는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 유지나, 「할리우드 SF는 후기산업사회 이데올로기인가?」, 영화연구 20호, 2002, 235쪽. [본문으로]
  2. 이것은 2차 세계대전의 파시즘에 대한 공포와 원자폭탄과 같은 과학기술이 가져온 살상력에 대한 공포가 정체 모를 외계존재가 지닌 위협적인 과학 기술력으로 치환되는 것과 동시에 구소련의 과학적 성취를 외계의 괴물로 치환하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위의 글, 236쪽. [본문으로]
  3. 이후 SF영화의 계보는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의 <터미네이터>(The Terminator / 1984), 테리 길리엄(Terry Gilliam)의 <브라질>(Brazi / 1985), 폴 버호벤(Paul Verhoeven)의 <로보캅>(RoboCop / 1987)과 <토탈리콜>(Total Recall / 1990) 등으로 이어진다. [본문으로]
  4. 로이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서 예수의 이미지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데커드와의 마지막 격투 씬에서 로이는 자신의 생명이 여기서 끝이라는 것을 인지하자 자신의 손바닥에 못을 밀어 넣는다. 이는 십자가상의 예수에 대한 명백한 인유이다. 게다가 로이가 숨을 거두자 그의 품에서 비둘기가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장면은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성령을 상징한다. Michael Martin, "Mediations on Blade Runner", The Journal of Interdisciplinary Studies 17, No 1/2, 2005, pp.105~22. [본문으로]
  5. 장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현상을 시뮬레이션(simulation)의 세계인 시뮬라크르(simulacre)와 연결 짓는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오늘날 우리는 가상실재, 즉 시뮬라크르의 미혹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왜냐하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물(실재)이 기호로 대체되고 시뮬라크르들이 실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뮬라크르는 단순한 복사(copy)가 아니라 그것 자체로서 원본보다 더 실재적인 힘과 진실성을 지니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하태완 譯, 『시뮬라시옹』, (서울: 민음사, 2001) 참조. [본문으로]
  6. 데카르트(R. Descartes)의 『방법서설』(Discourse on the method of rightly conducting the reason, and seeking truth in the sciences)에 나오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I think therefore I am)라는 말을 인용하는 복제인간 프리스를 통해, 사고하는 것이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라는 근대의 정의는 영화 속에서 보기 좋게 조롱당한다. [ [본문으로]
  7. 딕의 소설에서는 본질(인간)을 우선시하는 위계질서가 존재한다. 따라서 원본과 모방은 구별되어야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언제나 원본은 모사품보다 우월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하지만 <블레이드 러너>에서는 그러한 경계 자체가 모호해질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모사품(리플리칸트)이 원본(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에 예술작품의 복제품은 원작이 지니는 유일무이한 ‘분위기’(aura)를 위축시킨다고 말한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반성완 譯,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서울: 민음사, 1983), 202쪽. [본문으로]
  8. <블레이드 러너>가 만들어지던 1980대 미국의 상황은 높은 인플레이션과 실업률로 인해 경제가 침체하기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 기반의 문제들이 불거지면서 제국의 힘이 점차 쇠퇴해져 가는 상황이었다. 이때 로널드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이 제40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1981년)되면서 구속 없는 자본주의의 영광과 함께 사회복지 예산의 감소를 선언하는 등 ‘신자유주의’로 일컬어지는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하지만 미국 사회는 환경문제, 범죄, 자본 편중, 도시의 부패 등 더 많은 문제들을 야기하게 되는데, 리들리 스콧은 <블레이드 러너>에서 이러한 1980년대의 미국 정황과 함께 20세기 후반 새롭게 대두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기술, 환경오염, 인간 정체성 문제 등을 함께 다루고 있다. [본문으로]
  9. 유전자 설계자인 세바스찬은 조로증을 앓고 있어 우주 개척지로 이주할 자격이 없고, 권력의 중심에 있는 타이렐 회장은 큼지막한 안경을 쓰고 있으며, 또 다른 블레이드 러너인 개프는 다리가 불편해서 지팡이의 도움을 받고 있다. [본문으로]
  10. Giuliana Bruno, "Ramble City: Postmodernism and Blade Runner", October, Vol. 41. (Summer, 1987), p.65. [본문으로]
  11. M. Heidegger, Being and Time(이하 BT로 약기함), Trans. J. Macquarrie & E. Robinson. (New York: Harper & Row, 1962), pp.26-27. [본문으로]
  12. 소광희,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강의』, (서울: 문예출판사, 2004), 26쪽. [본문으로]
  13. BT. p.321. [본문으로]
  14. BT, p.183. [본문으로]
  15. BT, p.41, 277. [본문으로]
  16. BT, p.436. [본문으로]
  17. Forest Pyle, "Making Cyborgs, Making Humans: Of Terminators and Blade Runner", Film Theory Goes to the Movies, Ed, Jim Collins, Radner, Hilary and Collins, Ava Preacher, (New York: Routledge, 1993), p.236. [본문으로]
  18. 이진경, 「블레이드 러너, 복제인간과 안티-오이디푸스」,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대한 7편의 영화』, (서울: 새길, 1995), 49쪽. [본문으로]
  19. Alison Landsberg, "prosthetic Memory: Total Recall and Blade Runner", The Cybercultures Reader, Ed. David Bell and Barbara M. Kennedy. (London: Routledge, 2000), p.198.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