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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예술산책

프랑스 누벨바그

프랑스 누벨바그



프랑스 누벨바그 & <네 멋대로 해라> (1960년), 장 뤽 고다르

1. 종전이후 프랑스 영화계


  종전이후 가장 먼저 프랑스 영화계를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사건은 1946년 블룸-비르네스 조약(Blum-Byrnes agreement)이다. 이 조약의 내용에는 미국 영화 수입에 대한 전면적 개방과 프랑스의 모든 극장에서는 1/4분기마다 최소 4주일 동안 자국 영화를 상영해야 한다는 ‘자국영화 의무 상영일수’를 규정한 스크린 쿼터제도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 협약은 프랑스 영화가 1년에 16주밖에 상영되지 않는다는 위협으로 받아 들여졌다. 왜냐하면 종전 후 폐허에서 힘겹게 일어난 프랑스 영화가 자국에서 이미 생산비를 모두 회수한 미국 영화들과 경쟁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 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조약은 영화업자, 영화 예술인들로부터 엄청난 항의를 불러 일으켰고 급기야 1948년 파리조약으로 수정된다. 그 내용은 프랑스 영화들만을 독점적으로 상영하는 기간을 1/4분기마다 4주가 아닌 5주, 즉 1년에 20주로 늘인다는 것과 미국 영화는 1년에 121편으로 한정시킨다는 것이었다.

  그 후 1952년 불미 협약 재수정시에는 영화 국적과 상관없이 프랑스어로 대사가 녹음된 외화의 수입허가를 138편으로 확정하고 미국 영화는 90편으로 수입량을 한정시키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줄곧 1950년대 프랑스 영화계는 프랑스영화가 43-50%, 미국 영화는 40%를 넘지 못하는 시장 점유율을 보이게 된다.

  한편 1946년 10월25일에는 영화행정기구 국립영화센터(Centre National de la Cinematographie: CNC)가 영화 산업법 제1조에 의해 창설되면서 극장표의 일률 발급과 관리, 그리고 1948년부터 - 영화 산업 지원법이 제정한 - 영화관계 세제를 통해 모은 기금을 영화계에 환원시키는 지원업무를 시작하게 되어 프랑스 영화계에 큰 보탬을 주게 되지만 이러한 정책들은 예상과는 반대로 프랑스의 영화제작에 역기능을 초래하게 된다.
  이에 대해 당시(1956년) CNC 공사장 자크 플로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자동 지원 장치가 제작자들로 하여금 영화상인(수출업자)과 같은 사고방식을 갖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자동 지원액은 영화 총수익에 비례하여 돌아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흥행 성공 사례가 있는 소재를 채택하거나 유명 작가의 소설을 영화화하거나 국제적으로 상업적 가치가 인정된 스타를 기용하거나 이전과 비슷한 공식의 영화를 만들어 내는 등 무사 안일주의에 빠지게 만들었다.”

  부언하자면 일련의 예로 과거에 돈이 되던 종류의 영화들이 반복되어 나타났으며 확실한 신용을 보장받았던 시나리오 작가들이 다시 고용되는 등 여러 가지 현상이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여하튼 1950년대 프랑스 영화시장은 미국 영화의 공격적 시장 지배가 억제되고 TV의 위협도 아직은 미미한 상황에서 활발한 제작과 관객 동원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그러나 엄밀히 말한다면 <카이에 뒤 시네마 Cahiers du Cinema> 출신의 비평가들이 ‘아버지의 영화’라고 공격한 고전적 문법의 문예영화가 주조를 이루었다. 

  하지만 제작 환경은 확실히 변하고 있었다.
  그 중 첫 번째로는 1953년에 개정된 우수 단편 영화 보상 제도를 들 수 있다. 당시 극장에서는 (장편)영화를 상영할 경우 다른 단편 영화를 끼워서 상영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는 1940년 법규에 의해 모든 극장이 본편 상영의 보충 프로그램으로 1300미터 이하 길이의 영화를 의무적으로 상영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53년 개정된 우수 단편 영화에 대한 보상제도는 이제껏 법규의 보호아래서 행해졌던 안이한 제작 방식에 제동을 걸고 좋은 단편 영화들을 만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단편 영화는 이제 제작자가 발굴한 재능 있는 젊은 감독들의 시험대가 되었고 몇 년씩이나 장편 영화 감독의 조수를 하며 기다리지 않아도 젊은 감독들은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는 누벨바그 등장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두 번째로는 기술적 측면을 들 수 있다. 예전의 영화 촬영이 스튜디오 시스템에 묶여 있었던 것은 무겁고 큰 촬영 기자재, 수많은 복잡한 조명 기자재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1947년 프랑스 최초의 35㎜ 소형 카메라 ‘카메플랙스 에클레르’의 등장과 더불어 자연광으로도 촬영이 가능한 고감도 필름들이 시장에 나옴으로써 누벨바그 세대가 저예산으로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이 마련된다.

  세 번째로는 영화 관객층의 다변화 현상이다. 시네클럽 운동과 앙리 랑글루와의 시네마테크, 영화 전문 잡지 및 일반 신문 잡지에 고정적으로 글을 쓰는 전문 영화 비평가들의 등장, <카이에 뒤 시네마>(1951년 창간)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던 ‘카이에 가족들’, 그리고 대학(소르본, 1946년)에 처음으로 신설된 영화사 강의 등은 영화문화가 대중적으로 심층화되고 다각화되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으로 누벨바그 기수들의 등장에 있어 사회적 배경이 된다. 
  네 번째로는 당시 청춘스타 제라르 필립의 인기와 28세였던 로제 바담이 만든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1956)의 경이적인 성공을 - 주연을 맡았던 브리지트 바르도의 신화화와 함께 - 들 수 있다.
  이러한 추세는 결국 1950년대 후반의 제작자들이 젊은이들이 만든 영화를 원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더불어 1930년대에서 50년대까지를 지배했던 구세대의 영화감독들의 노쇠, 사망 또한 누벨바그 세대의 감독들의 영화계 진출을 용이하게 한 배경이기도 하다.

2. 프랑스 누벨바그의 등장


  원래 누벨바그라는 말은 1950년대 후반에 중도 좌파적 성향의 주간지 <렉스 프레스 L'Express>의 편집장인 프랑수아즈 지루가 새롭게 떠오르는 청년계급을 가리키기 위해 고안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용어는 당시 급속하게 영화의 추세와 연관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1961년 10월 <프랑스 옵셀바트르>지의 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벨바그는 운동도, 그룹도 아니다. 그것은 그 동안 1년에 서너 명 정도의 신인 감독만을 허락하던 영화업계에 단 2년 사이에 50여명의 새로운 이름이 감독으로 오르게 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그저 양적일 개념일 뿐이다.”

  하지만 양적 변화가 질적 승화를 가져온다는 것은 맑스의 논리를 언급하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며 이 시기에 감독들의 교체가 일어난 것 또한 확실하다. 수잔 헤이워드에 따르면 1959~63년에 약 170여 명의 새로운 영화감독이 등장했다고 하는데 이 당시 데뷔한 감독들을 그 출신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① 전통적인 방식으로 기성 픽션 영화감독의 조감독 코스를 밟아 장편 영화에 접근한 사람들 : 에두와르 몰리나로, 조르쥬 로트네르, 루이 말, 클로드 소테, 미셸 드빌 등
  ② 단편(문화/예술)영화 제작 과정을 거쳐 장편 영화에 접근한 사람들 : 크리스 마르케르, 장 루슈, 조르쥬 프랑주, 피에르 카스트, 아그네스 바르다, 알랭 레네 등
  ③ <카이에 뒤 시네마>를 중심으로 한 필진들, 영화 평론가 출신으로서 자체적으로 단편영화를 제작하다가 장편 영화를 만들게 된 사람들 :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클로드 샤브롤, 에릭 로메르, 자크 리베트 등


Jean-Luc Godard  & Francois Truffaut 

  이 가운데 ‘좌안파’(Rive Gauche)라 불리우는 두 번째 그룹과 <카이에 뒤 시네마>를 중심으로 한 세 번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 누벨바그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전자는 상업성이 배제된 영화 제작 현장에서 상대적인 자유를 누리며 자신의 세계를 찾기 시작한 실천파이고 후자는 시네마테크와 개봉관을 오가며 그리피스와 에이젠슈테인, 혹스와 히치콕 등의 영화들을 낱낱이 분석하고 ‘작가정책’을 논하던 이론파들이다. 
  이러한 누벨바그는 1959년 5월 칸 영화제에서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 Les Quatre Cents Coups / The 400 Blows>가 감독상을,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 Hiroshima, Mon Amour>이 영화작가 협회상을 수상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 작가정책의 발단은 1954년 22세의 평론가 프랑수아 트뤼포가 <카이에 뒤 시네마>에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A Certain Tendency in the French Cinema)이라는 글을 통해 작가와 장인을 구분하면서 이전의 영화 즉 ‘아버지의 영화’는 죽었음을 선고함으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트뤼포는 진정한 영화작가는 누구이며, 그것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작가로서의 감독을 중요시하고 있다. 제임스 모나코, 『뉴 웨이브1』, 권영성․민현준 譯, (서울: 한나래, 1996), 9.

 
<400번의 구타> & <히로시마 내 사랑>

3. 두 개의 누벨바그


  누벨바그 영화감독들은 대부분 비정치적인 인물들이었다. 만약 이들의 영화에서 정치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면 그것은 일부 영화감독들이 1930년대 영화의 부르주아 비판의 전통을 잇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간혹 누벨바그가 정치적으로 인식되는 이유가 있다. 이는 두 개의 누벨바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의 것은 1958~62년에, 나중의 것은 1966~68년에 도래했다.
  첫 번째 누벨바그는 무정부적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에 앞섰던 영화에 대해서만 그러했다. 즉 ‘아버지의 영화’에 대해서만 말이다. 반면 두 번째 누벨바그는 명확히 정치적이었다.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들은 이 둘을 뒤섞어 하나로 생각하고는 이들의 영화들이 정치적인 것이었다고 인식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시기별로 누벨바그의 특징을 간략히 정리해 보자. 

  1958~62년   이들의 영화는 내러티브 및 시각적 차원에 있어 1950년대 영화의 약호와 관습들과 완전히 결별하고 있다. 내러티브적 측면에서 보면 이 영화들에는 자주 이야기가 없거나 이야기에 현실성을 불어 넣는 것들도 별로 없다. 시작, 중간, 결말도 확연히 구분되지 않는다. 흔히 그것은 삶의 한 단편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1950년대식의 문학작품의 각색이나 ‘고급’문학의 분위기는 사라졌고 만일 각색을 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대부분 싸구려 소설들(pulp fiction) 또는 대중 소설들(popular fiction)이었다. - 그들은 특히 미국의 탐정 소설을 선호했다. - 스타도 거의 없었다. 시대는 ‘언제나 변함없는’ 1960년대였다. 담론들은 동시대적이고 젊은이들에 대한 것이었다. 섹슈얼리티에 관계된 터부들은 파괴되었고 - 부분적으로는 이른바 ‘자유연애’ 현상의 덕을 보았다. - 커플들은 권력관계, 커뮤니케이션의 부재, 그리고 정체성의 문제 등과 관련된 복합적인 주체로 재현되었다. 여성의 재현도 보다 긍정적으로 되어 이들은 내러티브에서 더욱 중심적인 존재가 되었고 욕망에 있어 더욱 수행적이 되었다. 시각적 차원에서도 점프 컷과 매치되지 않는 숏을 통해 이루어지는 빠른 편집 스타일은 그 전까지 지배적이었던 이음매 없는 편집 스타일을 대체했다.
  또한 TV에서 흔히 사용되던 경량 카메라를 채택함으로써 스튜디오를 나와 거리와 파리 근교에서 촬영하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빠르고 값싼 필름 스톡의 등장도 이에 기여했다.

  1966~68년   이 두 번째 누벨바그시기에 이르러서는 보다 정치적이 되었었고 지배 이데올로기의 긍정적인 반영은 거의 모습을 감추게 된다. 특히 고다르의 영화에서 보면 -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 세가지 것들>(1966), <주말>(1967), <중국여인>(1967> - 부르주아의 신화(특히 결혼, 가정, 소비행위를 둘러싼 신화들)는 산산조각이 나고 비정상적인 것이 된다. 반면에 소비 붐, 핵전쟁, 베트남, 학생운동, 청소년기, 이 모든 것들이 다루어져야 하는 소재들이 되었다. 이 영화들은 부르주아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것들을 비정상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영화제작과정에 있어서도 반 할리우드적인 영화였다.(핸드헬드 카메라, 스튜디오 제작의 배제, 그 자신을 드러내는 편집 스타일, 스타 시스템의 거부 등) 

      장 뤽 고다르의 작품들입니다.
      1. 네 멋대로 해라(1960년)  2. 비브르 사 비(1962년)  3. 기관총부대(1963년) 
      4.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 세가지 것들(1966년)  5. 주말(1967년)  6. 중국여인(1967년)

  흥미로운 것은 이 두 누벨바그의 시기가 프랑스 현대사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격렬한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첫째 시기인 1958~62년은 제5공화국의 등장과 대통령의 막강한 권력 - 의회에 대한 절대적인 권력 - 이 여러 제도에 미친 효과와 일치한다. 또한 이 시기는 알제리의 피비린내 나는 탈식민화의 시기와 일치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첫 번째 누벨바그의 무정부적 에너지가 정치적인 것으로 인식된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두 번째 시기인 1966~68년은 드골 정권의 권위주의적인 통치 스타일에 대한 환멸, 팽창하는 도시 인구 및 학생 수를 수용할 자원의 부족에서 야기된 사회적․교육적 불안정, 노동자들의 생활조건 및 실업에 대한 관심 등과 일치하는데, 이 모든 것은 1968년 5월에 그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4. 누벨바그의 특징과 공헌


  이러한 프랑스 누벨바그의 특징들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① 당시 활약하던 사상가 까뮈(Albert Camus), 사르트르(Jean-Paul Sartre) 등의 실존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아 우연적인 등장인물, 극적 동기가 없는 사건 등을 취급하고 있으며, ② 형식에 있어서는 당대의 문학형식이던 신소설(Nouveau Roman)과 마찬가지로 열려진 느슨한 구조를 견지함으로써 더 이상 내러티브 줄거리의 끝은 산뜻하게 마무리 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느슨함과 개방성은 시간적 순서의 필요성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감정(영화감독과 등장인물들)의 지시에 따른 시간과 공간의 구성을 가능하게 하였다. ③ 이들은 영화와 영화제작에 관한 것들을 영화 속에서 보여주면서 즉흥적인 카메라와 연기 및 야외촬영의 이점을 활용하였고 다른 영화인들과 영화들을 언급하면서 자기들만의 농담을 즐겼다. ④ 무성영화 이래로 초기의 기법을 다시 현대적 영화문법으로 재해석하여 사용하는 점은 정말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의 영화들이 비록 개인에 대한 집착 - 작가에 대한 강조와 고백적인 스타일 - 때문에 비판받기는 했지만, 이들 새로운 영화감독들의 엄청난 유입으로(거의 170명에 이르는) 말미암아 제작 자금은 분산되었고 이로 인해 많은 영화들이 저예산으로 만들어져야 했다. 또한 값싼 경량 카메라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결국 카메라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것만큼은 그들의 공로로 돌려야 할 것이다.
  이런 효과는 그동안 영화에서 소외되었던 목소리들이 카메라를 사용할 수 있게 했고 1970년대와 80년대에 들어서는 여성, 흑인, 베르(프랑스의 아랍인들) 등이 영화제작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400번의 구타, Les Quatre Cents Coups / The 400 Blows> (1959년), 프랑수아 트뤼포


<쥴 앤 짐, Jules et Jim / Jules and Jim> (1962년), 프랑수아 트뤼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