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앎/삶잇기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정리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정리

 

1. 序

 

  베버(Marx Weber, 1864~1920)는 자본주의를 단순한 경제 체제로 이해하기 보다는 사람들의 생활양식이나 가치관, 신념 등과 연관된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바라보았다. 이러한 자본주의는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중국이나 인도, 바빌로니아에도 그리고 고대와 중세에도 존재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근대) 자본주의의 독특한 에토스, 즉 직업윤리로서의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베버의 진단이었다.(26,76) 그렇기에 베버의 관심은 근대의 합리적인 자본주의가 왜 유독 유럽에서만 출현하게 되었는지,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함에 있어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추적해 밝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이 오직 종교개혁의 일정한 영향의 결과로만 발생할 수 있었다든가, 심지어 경제체계로서의 자본주의가 종교개혁의 산물이라는 등의 테제는 결코 옹호되어서는 안 된다고 선을 긋는다.(138) 이러한 베버의 입장은 인간이 현실을 인식할 때, 언제나 현실의 일부분만을 포착할 수밖에 없다는 인간의 유한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베버, 2011 : 63~64) 베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특정하고 <일면적> 관점에 근거하지 않은,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학문적 <사회현상> 분석은 없다.”(베버, 2011 : 63)

 

  그렇기에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각주:1]에서 자신의 연구범위를 칼뱅주의의 특정 신앙요소들과 근대 자본주의 정신 사이에 일종의 ‘선택적 친화력’이 있는지를 밝히는 것으로 한정시키고 있다.(138) 이 글은 베버의 두 논문인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전체적으로 요약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물론 베버의 문제의식에서 보자면 아래의 요약문도 나 자신의 인식관심의 방향에 의해 규정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2. 첫 번째 논문 : 문제

 

2-1. 신앙고백과 사회계층

 

  베버는 대규모 근대적 상공업에서 자본 소유, 경영, 그리고 고급 노동에 종사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수가 상대적으로 많다는 사회 현상에 주목한다.[각주:2] 이는 종교개혁을 통해 낡은 전통 일반과 종교제도들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는 평이한 결론으로 쉽게 귀결될 수도 있지만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자신의 신도들에게 가톨릭보다 훨씬 더 엄격한 규율을 요구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48) 특히 칼뱅주의의 경우, 개인에 대한 교회의 통제는 극도로 엄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계에 의하면, 거의 모든 곳에서 자본가와 기업가, 그리고 고급 숙련노동층, 특히 기술적으로 또는 상업적으로 고도의 훈련을 받은 근대적 기업의 종업원들이 현저하게 프로테스탄트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45)
  베버는 가톨릭교도들과는 달리 프로테스탄트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경제적 합리주의에 대한 특별한 경향성에 주목하면서, 초기 프로테스탄티즘 정신의 일정한 특성과 근대 자본주의 문화 사이에 어떠한 내적 친화성을 찾아야 한다면 그것은 순수한 종교적 특징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52,59)

 

2-2. 자본주의 ‘정신’

 

  이어 베버는 미국의 100달러 지폐 속 주인공이자 ‘근대 자본주의 인간의 전형’인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의 기록을 인용한다.(72~74) ‘시간이 돈임을 명심하라’는 말로 시작되는 그의 글에서 베버는, 합리성을 근간으로 한 자본증식을 개인의 의무로 여기는 프랭클린의 사고방식이 단순한 처세술을 넘어 자본주의의 절대적인 기조이자 에토스임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75~77)

 

  “직업적으로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는 정신적 태도를 여기에서 잠정적으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표현한다면, … 그 정신적 태도는 근대 자본주의적 기업에서 가장 적합한 형태를 발견했고, 자본주의 기업은 그 태도에서 가장 적합한 정신적 추진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89)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는 성경의 말씀처럼 자족하는 삶을 추구하였기에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만큼만 벌기 위해 일을 했고 삶의 템포 또한 전반적으로 느긋했다. 베버는 이러한 전통주의적 경제의 일상을 ‘역사적 개체’인 선대업자(先貸業者)를 통해 묘사해 낸다.(90) 그러나 어느 순간, 갑자기 합리적인 젊은 선대업자가 등장하더니 경영의 합리화 과정을 통해 생산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면서 박리다매의 원칙을 구현하며 이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혁이 야기한 것은 화폐의 유입이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의 도래였고, 자본주의 정신에 충만한 사람들은 일종의 금욕적 특징을 띠며 직업(돈벌이)을 하나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92,94)

 

2-3. 루터의 직업개념 : 연구과제

 

  이러한 ‘소명으로서의 직업’ 개념은 루터가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직업’이라는 뜻과 ‘소명’이라는 뜻을 동시에 품고 있는 ‘베루프’(Beruf)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창출되었음을 베버는 개념사 연구를 통해 밝혀낸다.(121) 물론 종교개혁 이전의 초기 루터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의 영향을 받아 세속적 생활과 신앙생활을 무관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 루터에게 있어 세속적인 직업노동은 이웃 사랑의 외적 표현으로 여겨졌고 세속적 의무의 이행은 신을 기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자 신의 의지이며, 허용된 모든 직업은 신 앞에서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 되었다.(123~124)
  그러나 열광주의자들과 농민폭동을 직접 목도한 루터가 세속적 권력에 복종하며 주어진 처지에 순응하라는 섭리신앙(롬13:1)[각주:3]을 강조하면서부터, 신의 섭리로서의 루터의 직업 사상은 적극적인 직업윤리로 발전하지 못하고 전통주의적 색채에 머무름으로써 자본주의 정신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 베버의 진단이다.(129) 다시 말해 루터(주의)에게는 칼뱅주의에서 나타나는 항구적인 자기통제에 대한 동인으로서의 확증사상이 부재했기 때문에 개인이 자신의 삶을 계획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심리학적 동인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217,219) [각주:4]
  물론 종교개혁가들에게는 오직 영혼 구원만이 그들의 삶과 활동의 중심점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의 윤리적 목표와 그들의 교리의 실천적 영향은 모두 여기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는 어디까지나 순수한 종교적 동기의 귀결이었다. 종교개혁가들 중 어느 누구도 윤리적인 개혁 강령을 중심적인 관점으로 삼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개혁이 의도치 않은 문화적 결과로서 직업윤리를 낳았다는 것이 베버의 지론이다. 베버는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종교개혁의 문화적 영향은 상당 부분 종교개혁가들의 활동에 있어 예상치 못했던 혹은 심지어 원치 않았던 결과였으며, 때로는 그들 자신이 염두에 두었던 것과 동떨어졌거나 심지어 대립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137)

 

 

3. 두 번째 논문 :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윤리

 

3-1. 세속적 금욕주의의 종교적 토대

 

  베버는 칼뱅주의를 근간으로 독일 경건주의와 감리교, 그리고 제세례파 운동에서 발생한 분파들을 차례로 다룬다.[각주:5]

  먼저 칼뱅주의의 경우, 가장 특징적인 교리는 예정론이다. 이 예정론에 의하면 - 인간의 노력 여하에 관계없이 -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신의 은총을 통해 구원받도록 이미 선택되어져 있다.(181) 내세가 현세적 삶의 모든 관심사보다 더 중요시 되던 이들에게 개인적 고해성사도, 회개도, 성례전과 교회도, 심지어 신조차 영원한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예정론은 모두에게 전대미문의 내적 고독감을 불러왔다.(182) 논리적으로만 보자면 이러한 예정론은 자연스럽게 숙명론으로 귀결될 수도 있지만 칼뱅주의는 그 발전 과정에서 세속적인 직업 생활을 통해 신앙을 확증할 필요가 있다는 확증사상을 첨가시킴으로써 심리학적으로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 베버의 분석이다.(280)[각주:6] 즉 자신이 선택받은 일원임을 내적ㆍ외적으로 매순간 확증하기 위해 칼뱅주의자들은 - 체계적인 자기통제 아래 - 신으로부터 소명 받은 직업노동에 헌신하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이윤을 쾌락이나 향락 또는 경제 외적 목적을 위해 낭비하지 않고 지속적인 사업에 투자함으로써 신의 영광을 증대시키고자 노력하게 된 것이다.(194,265) 베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컨대 선행은 구원을 획득하는 수단으로서는 절대적으로 부적절하지만 … 선택의 표지로서는 불가결하다. 선행은 … 구원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리는 기술적 수단이다. … 그러므로 칼뱅주의자들은 …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창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창조는 … 매 순간 선택되었는가 아니면 버림받았는가의 냉혹한 양자택일에 직면해 행해지는 체계적인 자기통제의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198)
  “성도들의 삶은 오로지 초월적인 목표, 즉 구원에 지향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현세적 진행과정에서 철저히 합리화되었고 지상에서 신의 영광을 드높인다는 오로지 한 가지 관점에 의해 지배되었다. … 그런데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직 자아의 부단한 성찰에 의해 인도되는 삶만이 자연 상태(status naturalis)를 극복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 이러한 합리화 과정의 결과로 개혁주의 신앙에 특별히 금욕주의적인 성격이 부여되었다.”(202~203)

 

  이어 베버는 칼뱅주의 이외의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형태를 다룬다. 먼저 독일 경건주의의 경우, 영국과 네덜란드의 칼뱅주의적 토양에서 성장했지만 17세기 말경에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의 활약으로 루터주의에 흡수되면서 결국 루터주의의 교회 내부 운동으로 머물게 된다.(167~168) 베버의 분석에 의하면, 인간의 구원을 직업노동을 통한 객관적 결과물로서 인지했던 칼뱅주의와는 달리, 독일 경건주의는 감정적 측면을 강조하여 신과의 화해와 합일을 통해 현세에서 구원을 누리려는 방향으로 굴절되어 버린 것이다.(221,230) 이는 칼뱅주의자들의 합리적인 인격이 감정에 의해 무너지지 않도록 버텨주던 ‘제동장치들’이 약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다.(222) 결국 이러한 차이로 인해 경건주의가 배양한 덕목이 ‘직업에 충실한’ 관리, 피고용인, 노동자 및 가내공업자, 나아가 신을 기쁘게 하려는 겸양의 심성을 지닌 고용주를 육성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던 것과는 달리, 칼뱅주의는 시민계층적ㆍ자본주의적 기업가들의 엄격하고 정직하며 적극적인 정신과 보다 선택적 친화력을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베버는 평가한다.(231) 베버의 이러한 분석은 영국과 같은 나라들에 비해 베버 당시의 독일이 왜 자본주의적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는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세 번째로 베버는 감리교에 대해 언급한다. 구원의 확신을 위해 ‘회심’이라는 감정적 행위를 중요시한 측면에서 분명 독일 경건주의와 친화력이 존재하지만 감리교에 있어 진정한 회심이란 더 이상 죄가 자신에 대해 권세를 갖지 못하도록 자신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를 증명해야만 하는 것이었다.(231,233) 이는 감리교가 은총 상태에 대한 감정과 함께 품행을 거듭남의 명백한 표지로 간주한 것이다.[각주:7] 결국 감리교가 추구하는 성화로서의 삶이 예정론에 대한 일종의 대체물로 기능함으로써 독일 경건주의 식의 내면적인 감정적 기독교로 귀결되지 않고 합리적으로 완전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 베버의 진단이다.(235)
  마지막으로 베버는 재세례파 운동과 여기서 파생된 침례교와 메노파, 그리고 퀘이커교 등을 살펴본다. 이들의 중심사상은 ‘믿는 자들의 교회’ 사상이다.(236) 이들은 그리스도처럼 직접 신에 의해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들로서 오직 자신들만이 그리스도의 형제들이며, 자신들만으로 구성된 교회를 원했다.(238) 이러한 재세례파 공동체는 모든 세속적 즐거움과 단절하고 사도들을 엄격히 본받는 삶을 성서적 생활양식으로 생각했고, 신의 계시는 기록된 문서인 성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일상적 삶에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오늘날에도 지속된다고 믿었다.(238~239) 또한 이들은 성령을 통해 지속적으로 다가오는 ‘내면의 빛’만이 신의 성서적 계시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믿었는데, 급기야 이러한 사상은 종교적 탈주술화를 그 최종적인 논리적 단계까지 관철시키면서 - 퀘이커교의 경우 - 이성과 양심 속에서 성령이 내적으로 증거하는 것이 궁극적 의미를 지닌다는 교리로 발전하게 된다.(239~240) 이에 대해 베버는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는 신의 지배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거듭남에 대한 명백한 표지이며, 그에 부합하는 품행은 재세례파 공동체에게 구원의 요건이 되었다고 언급하면서 이러한 재세례파의 사상은 자연스럽게 직업노동으로 흘러들어와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한다.(240,243)
  정리하자면 모든 교파는 교의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은총 상태’를 하나의 신분으로 파악했고 이러한 신분의 획득은 ‘자연적’ 인간의 생활양식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특별한 종류의 품행, 즉 금욕주의적인 생활양식으로 말미암은 확증을 통해 보장받을 수 있었다.(247) 베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세를 지향하면서도 세속적 생활양식을 합리화한 것이야말로 금욕주의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 개념이 낳은 결과였다. 처음에 세속을 벗어나 고독 속으로 도피했던 기독교적 금욕주의는 이미 그때부터 세속을 체념함으로써 수도원으로부터 교회를 통해 세속을 지배해왔다. … 그런데 이제 기독교적 금욕주의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도록 수도원의 문을 굳게 닫아버리고 북적거리는 시정의 삶 가운데로 들어가 바로 그 세속적인 일상적 삶에 자신의 조직적인 방식을 침윤시키기 시작했으며, 그럼으로써 이 삶을 세속 안에서 합리적인 삶으로 변형시키기 시작했다.”(248)

 

3-2. 금욕주의와 자본주의 정신

 

  베버는 칼뱅주의에서 발생한 영국 청교주의가 직업 관념을 논리적으로 가장 일관되게 정초했다고 평가하면서 그 대표자 가운데 한 명인 리처드 박스터(Richard Baxter, 1615-1691)를 논의의 중심에 세운다.(332) 박스터에 의하면 윤리적으로 배척해야 하는 것은 소유에 안주하는 것이고, 부를 향락하며 그 결과 태만과 육욕에 빠지는 것이고, 거룩한 삶의 추구에서 이탈하는 것이다.(336) 성도들의 영원한 안식은 내세에 있으므로 이 지상에서 인간은 자신의 은총 상태를 확신하기 위해 낮 동안에는 그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해야 한다. 박스터는 시간 낭비야말로 모든 죄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죄라고 주장한다.(336) 이어 박스터는 노동에 대해 언급하면서, 노동은 이미 오래전에 그 효과가 검증된 금욕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신이 규정한 삶 일반의 자기 목적이기도 하다고 언급한다.(337) 박스터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살후3:10)는 사도 바울의 명제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됨을 강조하면서 노동 의욕의 결핍은 은총 받지 못한 상태의 징후라고 단언한다.(337~338) 나아가 신의 섭리는 모두에게 차별 없이 직업(소명)을 예비하기 때문에 누구나 신의 영광을 위해 일해야 하며, 이는 신의 명령이라고 역설한다.(339) 이와 함께 직업노동과 관련해서 박스터는 고정된 직업 없이 노동을 하는 것은 불안정할 뿐만 아니라 빈둥거리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기 때문에 고정된 직업노동이 최선이라고 언급하면서, 신은 노동 자체가 아니라 합리적 직업노동을 원한다고 설파한다.(340~341)
  부의 추구와 관련해서 박스터는 육욕과 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 신을 위한 것이라면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도 좋을 뿐만 아니라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다는 청교도적 관념을 언급한다.(342) 특히 신의 섭리에 따라 정직하게 자수성가한 부르주아는 ‘신이 그의 사업을 축복하신다’는 최상의 윤리적 평가를 받았다.(343) 이윤 추구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은 근대 사업가들의 활동을 정당화시켰고 이들에게 있어 영리활동은 하나의 ‘소명’이 되어 버렸다.(360)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이란 존재는 이 모든 재화의 주인이 아니라 신의 은총으로 자신에게 배당된 재화의 청지기라는 것이다.(350)
  베버는 이러한 청교주의의 세속적 금욕주의가 전통주의적 경제윤리로부터 재화 획득을 해방시키는 심리적 결과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이윤 추구를 신의 뜻으로 간주함으로써 과거의 질곡을 분쇄할 수 있었고 나아가 자본의 축적과 부의 생산적 사용이 가능해졌다고 평가한다.(351,353)
  베버는 근대 문화 일반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인 직업 관념에 기초한 합리적 생활양식이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신에서 탄생했다고 주장한다.(363) 하지만 문제는 부가 증대함에 따라 모든 형태의 자만심과 번뇌, 그리고 세상에 대한 애착이 함께 증가한다는 것이다. 과거 중세 수도원적 금욕주의를 끊임없이 좌초시킨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음을 베버는 지적한다.(355~356) 베버는 다시 박스터를 인용하여, 외적인 재화란 그저 ‘언제든지 벗어버릴 수 있는 얇은 외투’처럼 성도들의 어깨 위에 걸쳐 있는 것, 즉 통제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하지만 운명은 이 외투를 쇠우리로 만들어버렸다고 언급하면서 오늘날 금욕주의의 정신은 그 쇠우리에서 사라져버렸다고 단언한다.(365) 베버는 오늘날의 시대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세계의 외적인 재화는 점증하는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 …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는 기계적 토대 위에 존립하게 된 이래로 금욕주의 정신이라는 버팀목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 또한 ‘직업 의무’ 사상도 옛 종교적 신앙 내용의 망령이 되어 우리 삶을 배회하고 있다.”(365~366)

 

 

4. 結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1부(첫 번째 논문)에서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지배하는 지역에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 두드러지는 현상에 주목하면서 그 정신사적 연원을 종교개혁 시기 루터의 직업 개념에서 찾았다. 하지만 루터가 세속적인 직업생활에 도덕적 특성을 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직업관이 전통주의적 색채를 벋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한 베버는 루터 이후에 발전한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 개념에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종교사적 연원을 찾게 된다. 따라서 2부(두 번째 논문)의 주제는 1부에서 제시된 문제들과 관계들을 검토하고 설명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먼저 베버는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역사적 담지자인 칼뱅주의와 독일 경건주의, 감리교, 제세례파 운동에서 발생한 분파들을 - 칼뱅주의를 근간으로 해서 - 차례로 일별한 후, 칼뱅주의에서 발생한 영국 청교주의의 직업 관념을 중심으로 근대 자본주의 정신과의 선택적 친화력을 규명한다. 베버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논지를 끝맺는다. 

 

  “이 연구에서는 일단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이 영향을 끼친 사실과 방식을 비록 중요하기는 하지만 다양한 측면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 측면에서 그 영향의 동기로 소급해 구명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가 그 형성 과정과 특성에서 사회의 문화적 조건들, 그중에서도 특히 경제적 조건에 의해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가도 밝혀져야 할 것이다.”(369)

 


<참고문헌>

막스 베버, 2011, 전성우 譯, 『막스 베버 사회과학방법론 선집』, 나남
막스 베버, 2015, 김덕영 譯,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도서출판 길

 


  1.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1904년과 1905년에 베버가 2회에 걸쳐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이라는 저널에 발표한 두 편의 논문이다. 하지만 베버의 사망 직후인 1920년에 『종교사회학 논문집』제1권(1920년)에 다시 수록되었다. [본문으로]
  2. 베버는 이러한 현상이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경제적으로 부유한 도시들이 프로테스탄티즘으로 개종하였다는 역사적 사실과 부분적으로는 무관하지 않음을 인지하고 있다.(47) [본문으로]
  3. 베버는 섭리신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각 개인은 신이 일단 정해준 직업과 신분에 머물러야 하며, 지상에서의 노력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사회적 지위의 한계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섭리신앙에서는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주어진 처지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응과 동일시했다.”(129) [본문으로]
  4. 이후 베버는 프로테스탄트들이 자신들의 직업노동과 생활양식을 통해서 구원을 확증한다는 사상에 주목하게 되면서 그의 연구 과제를 칼뱅과 칼뱅주의, 그리고 다른 ‘청교주의적’ 분파들의 저작으로 전환하게 된다.(135,161) [본문으로]
  5. 베버는 이들 종파들을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이라고 부른다.(167) [본문으로]
  6. 이러한 확증사상은 어디까지나 신의 은총에 대한 인식근거(주관적 근거)이지 결코 실재근거(객관적 근거)가 아니다.(199) [본문으로]
  7.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선행을 행하지 않는 자는 결코 참된 신자가 아니라고까지 주장하였다.(233) [본문으로]